인생의 플랜 B가 필요한 이유
식당에 예약을 한 후 취소 없이 약속한 시간에 일방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노쇼(No-show)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예약은 가게 주인과 방문자 사이에 미리 약속을 정함으로써 주인에게는 매상에 대한 보장을, 방문자에게는 앉을자리가 없거나 무한정 기다리게 되는 불확실성을 제거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유익하다. 하지만 예약 손님을 받기 위해 또 다른 예약 문의나 방문 손님을 거절했는데 막상 예약 당사자가 사전에 아무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식당 주인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식당 주인에게 미치는 위험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예약금을 받거나 아예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으로 입장하는 식당들도 많이 있다.
12월 31일 자로 공로연수에 들어가는 직원 2명이 있어 월요일 점심 부서 전체 회식 일정이 잡혔다. 보통 회식을 하는 경우 식당 예약은 과서무 담당인데 현재 부서의 과서무가 이번 공로연수자 2명 중 1명, 즉 이번 회식의 주인공이었다. 팀장님께서 식당 예약을 부탁하셔서 흔쾌히 네! 하고 지난주 금요일에 한 식당에 예약을 걸었다. 12명, 메뉴는 지리. 그리고 월요일 당일 오전에 다시 한번 예약을 확인한 후 점심시간이 되자 약속한 시간에 닿기 위해 부지런히 출발했다. 부서 전체 회식이니만큼 서열 1위, 2위 3위는 1호차를, 다른 직원들은 동료의 차 두 대에 나눠서 총 3대의 차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제 신호를 받아 좌회전만 하면 5분 내로, 예약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할 지점에 이르렀을 때 예약한 식당에서 전화가 왔다.
- 네, 사장님! 지금 거의 다 왔어요. 신호 대기 중이라 5분 내로 도착이에요!
- 저기, 선생님, 죄송해서 어떡하죠? 오늘 점심 식사가 안 될 것 같은데요.
- 네에????? 뭐라고요? 아니 사장님 우리 지금 거의 다 왔는데 갑자기 식사가 안 된다니요?
- 아 그게, 저희 주방장이 지금 출근을 안 해서요.
- 사장님,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주방장이 출근을 안 했으면 적어도 1시간, 아니 30분 전에는 연락을 주셨어야죠!!!!!
- 저희도 주방장이 출근을 할 줄 알았지요......
너무 화가 나면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을 길게 할 여유가 없었다. 얼른 다른 식당을 섭외해서 어디든 들어가야 했다. 직원들끼리 간단하게 먹는 자리였으면 실장님께만 양해를 구하고 어디든 가면 그만이었을 텐데 오늘은 서열 1위가 공로연수자 2분을 위해 마련한 자리인 데다 무려 12명의 점심 한 끼가 달려 있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어도 어느 정도는 구색을 맞출 수 있는 식당이어야 했다. 국밥집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처 한방오리백숙으로 유명한 식당에 전화를 하기 위해 검색창에 상호명을 입력했는데 맙소사, '월요일 휴무', 자주 가던 중식당 두 곳도 마찬가지로 월요일이 휴무였다. 전복돌솥밥 집은 규모가 크지 않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식사가 불가능했고, 또 다른 한정식집은 휴무는 아닌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오늘 예약을 했던 곳은 평소 우리 대학의 또 다른 구내식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회식 장소로 특히 어른들과 손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였기에 자주 찾던 곳인데 이렇게 갑자기 배신을 하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예약을 한 날에 말이다. 운전을 하시던 동료선생님이 '돈풍년'으로 가게!' 하셨다. 아, 돈풍년! 비싸지만 고기 맛이 좋아서 저녁 회식으로 종종 이용하던 곳이다. 점심부터 고기 냄새가 배는 건 모두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후보에서 제외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걸 재고 따질 시간이 없었다. 식당에 전화를 해서 12명 자리 예약을 한 뒤, 바로 다른 차에 타고 계신 팀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팀장님께서 1호차에도 연락을 주실 것이다. 식당에 주차를 하고 나서야 휴, 숨이 쉬어졌다.
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숟가락, 젓가락 물컵 등 기본은 세팅이 되어 있었다. 메뉴를 주문하고 착석하자 곧 나머지 반찬들이 들어왔고 상이 어느 정도 차려질 즘 팀장님과 실장님, 다른 동료들에 이어 서열 1위, 2위, 3위도 막 도착해 들어왔다. 상마다 숯불이 들어오자 차가웠던 공기가 순식간에 따뜻하게 덥혀졌고 달궈진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자 분위기도 달아올라 마치 처음부터 다른 곳이 아닌 이곳으로 약속을 정하고 온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에는 지리 말고 고기 먹기를 잘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아주셨다. 나름의 우여곡절로 짧은 시간이나마 마음 고생을 한 후에 먹게 된 고기여서 그랬는지 고기가 맛있긴 맛있었다. 정식으로 묶여 나오는 돌솥밥과 된장찌개도, 게장과 샐러드도 다 만족스러웠다. 우려한 대로 옷이며 머리에 고기 구운 냄새가 배긴 했으나 사무실 직원 전체가 고기 냄새를 풍길 테니 옆 사람 고기 냄새에 코를 킁킁거릴 일은 없을 터였다.
솔직히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식당 사장님의 노쇼라니! 그것도 도착 5분 전에 말이다. 그래서 여기가 안 되면 다른 곳에 가야겠다는 플랜 B를 계획하지 않았다. 예약을 했으니 시간에 맞춰 가는 것만이 내가 그린 밑그림이었는데 갑자기 손에서 붓이 미끄러져 그림을 망치게 된 것 같아 잠시 정신이 멍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미끄러진 붓 덕분에 더 멋진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는 1안, 안되면 2안 혹은 3안까지는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배움을 회식을 통해 얻었다.(40년을 넘게 살아도 순간 순간 배울 게 너무도 많다.) 개인적으로 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회식을 통해서 중요한 삶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니, 이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재미있는 여정임에 분명하다.
* 커버 사진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