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은 다시 내 몫?
셔츠에 캐주얼 정장바지. 유니폼처럼 매일 입던 츄리닝을 벗고 퇴사한 지 3년 만에 남편이 출근을 한다. 공무원 정식 발령은 아직이고 10월부터 기관에서 실무실습 중이다. 실무실습은 임용대기자 중에서 신청을 받았는데 먹여 살릴 처자식이 달린 30대 후반의 가장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신청. 그가 미혼이고, 내가 그의 아내가 아닌 여자친구였다면 당연히, 흔쾌히 여행을 권했을 것이다.
지난했던 수험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에게 휴식다운 휴식은 없었다. 6월에 시험이 끝나고 7월부터 계약직 근무, 일하면서 면접 준비, 9월엔 신규 임용 예정자 교육까지 일정들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연이었다. 2주 간 교육이 끝나고 열흘 정도 쉴 날이 있었지만 농사일을 도와 달라는 아버님 전화에 또 며칠은 밭에도 갔다. 남편의 합격 동기들 중 일부는 10월 1일 자로 발령을 받았다. 남편은 대상이 아니었다. 대신 실무실습을 하기로 했는데 근무를 언제부터 시작할지 정해진 바는 없다고 했다.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육지 친정에 갈 비행기는 8월 말에 이미 예약을 마쳤다. 평소 같으면 비행기 표를 내려오는 것까지 왕복으로 예약했을 테지만 이번엔 올라가는 편도만 예약해 두었다. 시간이 허락할 때, 부모님께서 정정하실 때 하루라도 더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이 참에 그동안 가보지 못한 국내 이곳저곳을 둘러볼 요량이었다. 개천절을 앞둔 10월 2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꽤나 연휴가 길어졌다. 출퇴근 생활자였다면 쾌재를 불렀을 게 당연하지만 현재 육아 휴직 중인 나나, 한시적 백수인 남편에게 황금연휴가 주는 감흥이 전혀 없었다. 무엄하게도 말이다.
육지에서 마음 편히 움직이려면 우리 차를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남편은 배편도 예약을 했두었더랬다. 여수, 남해를 돌아 속초까지... 몸보다 마음이 여행지에 먼저 닿아있던 때 실무실습 일정이 확정되었다. 10월부터 출근. 황금연휴를 앞에 두고 ‘무엄하게도’ 기뻐하지 않았던 탓일까? 우리가 생각한 최선은 11월 이후 발령이었는데 역시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남편의 비행기 표를 취소하지 않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남편 혼자 낙오할 뻔했다. 남편은 배편을 취소함과 동시에 제주로 돌아올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아이들과 나는 예정대로 육지에 좀 더 머물기로 했다.
정식 발령은 아니지만 몸 담을 기관으로 출퇴근을 한다는 건 계약직 근로와는 또 달랐나 보나. 남편은 첫날 아침 7시에 출발하며 전화를 했다. 근무 시작 9시보다 2시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도착하면 7시 30분이나 될까. 이것은 신입직원의 열정인가, 무모함인가. 사실 남편은 이전 직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통 6시 40분에는 출발했고 7시 20-30분에는 회사에 도착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거면 아마 못 할 거다. 일단 차 막히는 게 싫고, 커피도 한 잔 하며 하루를 여유 있게 시작하고 싶은 그의 성향이 남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 테지.
블라인드라는 직장인 커뮤니티에 일찍 출근하는 거에 대한 동료들의 부정적 반응 때문에 주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9시에 맞추어 출근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개인의 편의로 인해 대가 없는 추가 노동이 당연시된다면 다른 직원들 또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될 것을 우려했다. 남편과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시는 분들 대부분 남편과 비슷하게, 혹은 더 일찍 출근한다고 하니 이른 출근으로 눈총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이른 출근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하다.
문제는 밖에서는 여간해서 새지 않는 바가지가 집에만 오면 줄줄 샌다는 데 있다. 무슨 얘기냐면, 회사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쉬는 날에도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이 남자가 집안일에 있어서는 보고도 못 본 척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이전 직장을 다닐 때 갈등의 주 요인이 회사와 가정의 불균형이었던 걸 그새 잊은 모양새다. 수험 생활 동안 집안일에 열심이기에 철이 들어가나 보다 했더니 단지 눈칫밥을 먹지 않기 위한 꼼수에 불과했던 걸까? 아니면 이제 다시 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돈 버는 유세를 좀 해보겠다는 건가?(돈은 나도 버는데?) 결혼 8년 차에도 집안일 가지고 투닥 거리게 될 줄이야. 진짜 유세인지, 사회 재적응 기간인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 여보, 나 10만 원 보내줘. 야구부 가입비 내야 돼. 사내 동아리인 야구부 입단에 영업(?) 당한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가입비도 있나 보다. 한술 더 떠 유니폼이랑 야구 글로브 등 장비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원래도 야구를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보는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지 본인이 직접 한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예상치 못한 지출에 적잖이 당황하긴 했지만 취미생활이 없는 거보다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잠만 자거나 게임을 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뛰는 야구가 훨씬 유익하리라. 그런데 가만, 야구부 경기 있을 때 혼자만 쏙 빠져나가면 나 혼자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거 아냐? 참고로 이전 직장에서는 축구부였다. 축구는 주로 평일 야간에 했고 경기 후 회식까지 하고 오면 새벽일 때가 많았다. 이거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데? 송금을 위해 접속했던 은행 애플리케이션을 종료하려던 찰나에 남편이 말했다.
- 경기 있을 때 애들도 많이 데려온대. 나도 아들이랑 같이 가면 좋을 거 같아.
오호, 그렇단 말이지? 일단, 진행시켜!
집안일을 내가 더 하네, 당신은 안 하네 불평을 쏟아내고는 있지만 사실은 다시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 게 좋다. 도전의 끝이 전업남편이었다 해도 받아들였을 테지만 그는 역시 츄리닝보다는 셔츠를 입었을 때 아주 조금 더 멋있다. 남편 퇴근까지 미뤄둘 수 없는 아기 젖병 씻기, 거실 물걸레질 하기가 자연스레 내 몫이 된 건 차차 대화를 통해 풀어가기로 하고 지금은 다시 시작된 남편의 사회생활을 응원해 주련다. 열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