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콤달달 Dec 04. 2021

우리집에 퇴사한 남편이 산다(2)

아침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기지개를 켜고 침대를 벗어나기만 하면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감사와 푸념 사이를 오가는 사이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그렇게 1년도 훌쩍 지나간다.


남편이 퇴사한 지 1년이 넘었다.


남편은 본인의 퇴사가 다소 갑작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이를 낳고 얼마 후부터 남편이 머지않아 회사를 두만 두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남편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은 금융업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은행 일이라는 게 창구에 앉아서 찾아오는 고객님의 예금만 처리해주면 되는 게 아니다. 남편은 제주에 있는 어업과 밀접한 은행에 다녔는데 은행업 이외에도 수산물 판매업, 유통업 등 회사가 관여하고 있는 일의 종류다 다양했다. 총무과나 미래전략기획팀처럼 사무 일을 보기도 했고 유통과에서 수산물의 수매, 판매, 유통 등의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이 때는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저녁 8-9시까지 근무하는 날들의 연속이라 몸무게가 거의 10kg 가까이 빠졌었다. 그런데 이때보다 더 힘들었던 때는 여신업무, 즉 대출업무를 맡았을 때였던 것 같다. 매일 같이 담보 물건을 확인하느라 외근이 잦았고 밀린 업무는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근근이 감당했다.


남편의 월급 중 꽤 많은 금액이 회사 실적을 채우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회사는 금융부서에 있든 아니든 일정 건의 공제와 저축 등 해당 실적을 채우도록 했는데 연말 상여금과 관련이 있었다. 상여금을 포기하고 실적을 무시하려고 해도 어느 시기가 되면 부서에서 이른바 '쪼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싸고 좋은 보험이 줄줄이고 휴대폰 앱 터치 몇 번으로 예적금 간편 가입이 가능한데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나만 믿고' 해달라는 말이 쉽게 나올 리 없었다. 더군다나 남편의 친구들도 이제야 취업했거나, 결혼 한 지 얼마 안 된 사회 초년생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영업에 취약한 남편이었으므로 고객 유치는 하늘의 별따기였고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학원 강사로 일 할 때 학원을 그만 다니겠다는 학생과 학부모를 설득하는 일이 가장 하기 싫은 일이었으니 남편의 마음을 모를 리 없고 그렇다고 내가 발 벗고 나설 형편도 아니었다.


나의 불만이 바람이 꽉 들어찬 풍선만큼 부풀어 한 숨이라도 보태진다면 펑하고 터질 일만 남은 위태로운 날들 중 남편의 몸에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남편은 목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눕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밤을 꼴딱 새우고 근육통 진통제로 간신히 버텼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도 차도가 없었고 정형외과를 갔는데 디스크는 아니라고 했다. 거북목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고통의 정도가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휴직을 권유했다. 나도 본부에서 등록금 업무로 하루하루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중이라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었다. 바쁠 때면 한 달씩 내려와 집안일을 돌봐주시던 친정엄마도 오빠네 둘째 조카가 태어난 후로는 여의치가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의 회사는 보수적인 분위기였고 남자들 중 육아휴직을 한 전례가 없었다. 남편이 총대를 메고 육아휴직의 첫 수혜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앞으로 남자 후배들도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 실행력에 힘을 더했다. 남편의 선배들은 육아휴직은 여자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세대였고 아래 후배들은 생각을 있어도 말을 꺼내기 어려운 위치였으므로 직장생활 5년 차 대리인 남편이 물꼬를 틀 적임자였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고 이후에는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남편은 팀장님께 먼저 말씀을 드리고 인사담당자를 찾아가 육아휴직에 대한 의사를 전달했다고 나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렸다. 말을 꺼내기 어려웠을 텐데 고생했다고 그를 격려하고 다독였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고 다시 한번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육아휴직 안된대.

- 무슨 소리야. 뭐가 안돼. 법적으로 보장된 휴직인데 뭐가 안된다는 거야?

- 아 몰라, 안된대. (자세한 내막은 생략하고자 한다)

- 일단 알았어. 그럼 그냥 회사 그만둬. 이따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퇴근하고 다시 만난 우리는 계획 수정에 들어갔다, 휴직이 아닌 퇴사로. 남편에게 2년의 시간을 줄 테니 공무원 시험을 다시 준비해 보는 게 어떨지 물었다. 공무원이 되면 좋고 안되면 전업 남편을 하면 된다고, 당신이 살림과 육아를 맡아주면 본격적으로 회사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있고 지금까지 늦었던 승진을 만회할 수도 있을 거라고 남편의 부담감을 낮춰주었다. 남편을 설득하기 위한 사탕발림은 아니었다. 삶에는 늘 복병이 존재하니까 그 부분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업 남편을 제시한 것이지 2년 정도의 시간이면 남편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남편은 20대에 세무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전력이 있으므로 아예 생초짜보다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투자보다는 빠른 취업을 원하셨던 시조부모님의 바람을 져버릴 수 없어 칼을 빼들고 무를 썰고 있는 중에 다시 칼집에 칼을 담았더랬다. 그때 조금만 더 공부를 했더라면 또 어땠을까도 싶지만 살면서 '만약에' 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으니 과거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지금 시조부모님께서는 두 분 다 돌아가셨고 시부모님은 걱정은 하시겠지만 아내인 내가 괜찮다고 하면 말리진 못하실 것이었다. 남편은 장인 장모이자 나의 부모님의 걱정을 우려했는데 살면서 내가 내린 결정에 크게 말씀을 보태시는 분들이 아니었다. 네이버로 남편이 받게 될 퇴직금을 계산해보니 2년 정도는 공부할 자금이 될 것 같았다. 마이너스 통장도 있고, 무이자로 대출 가능한 아이의 통장 잔고(우리 집에서 아이가 가장 부자이다)도 넉넉했다.


2020년 9월 1일 자로 남편은 퇴사를 했다. 남편의 측근들은 부러워했고 나는 한순간에 '대단한 와이프'로 등극했다. 한 달 간은 놀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고 (정말로 온갖 유튜브를 섭렵하고 배달 음식으로 연명하면서 잘도 노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10월 1일부터 그 이름도 유명한 공단기에 등록했다. 이선재국어, 신영식한국사, 이종석행정법 등 내가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던 선생님들이 이제는 남편의 앞 날을 굽어 살펴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6개월 정도 공부하고 봤던 올해 국가직 시험에서 기본 과목인 국어와 영어와 한국사 시험 성적이 생각보다 높아서 바로 합격을 하는 게 아닌가 잠시 기뻐한 일도 있었지만 다른 두 과목 점수는 아직 합격선에 미치지 못했다. 공부라는 게 목표 점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조바심이 나지는 않는다. 누구보다도 가장 합격을 바라는 사람은 바로 남편일 것인데 내가 전전긍긍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전업남편도 괜찮다는 나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퇴사 후 실업급여는 받지 못했다. 의원면직은 실업급여의 대상이 아니었고, 육아휴직 신청 후 회사에 거부당해 퇴직한 경우는 지급이 가능했지만 실업급여 신청 시 그런 내용을 적으면 고용노동부에서 회사로 조사를 나간다고 했다. 남편은 그래도 5년 동안 몸담았던 회사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고 돈은 아쉬웠지만 남편의 의견을 존중했다. 영화의 명대사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남편의 퇴사가 가져온 변화들이 몇 가지 있다. 아침이 되면 나와 남편, 아이 셋이서 함께 출근을 한다, 나는 사무실로, 아이는 직장어린이집으로, 남편은 도서관으로.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누릴 수 있는 호사를 다 누리는 중이다. 하루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과 소임을 다한 후 다시 셋이서 함께 퇴근을 하는데 집에 가는 차 안에서 각자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공유한다. 나는 주로 불평불만일 때가 많고 아이는 친구와 다퉜거나 칭찬받은 이야기, 점심 메뉴로 뭐가 맛있었다는 소소한 일상이 주를 이룬다. 남편은 주로 듣는 역할을 하면서 추임새를 넣어주는데 오고 가는 시간이 주는 편안함에 만족감이 꽤 높은 편이다. 남편의 동행으로 인해 내가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도 나에게는 꽤 남는 장사이다. 남편을 괴롭게 했던 목의 통증들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배운 거북목 교정 스트레칭을 꾸준히 한 것도 있지만 컴퓨터 작업을 덜하고 무엇보다 업무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공부 스트레스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보다는 덜 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아이와 아빠, 부자간의 케미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늦게 퇴근해서 씻고 머리만 대면 잠만 자던 아빠가 같이 싸움놀이도 해주고, 건담도 조립해주고 산책도 자주 나가다 보니 아이한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엄마에서 엄마, 아빠로 바뀌었다. 요즘은 어몽어스 카드로 같은 그림 찾기 게임을 무조건 세 판은 해야 하루 일과가 마무리된다. 부모로서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흐뭇한 일이 또 있을까.


아직은 마이너스 통장까지 손대지 않았다. 내년 4월에 국가직, 6월에 지방직까지는 넉넉하지 않아도 여차저차 지낼  있을  같다.  이후엔 남편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다. (내색하진 않았다) 결과는 남편의 노력과 하늘의 선택에 달린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퇴직이라는  산을 넘으면서 우리는 잃은 것과 얻은  모두를 경험하며 조금  어른이 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