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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Dec 10. 2021

‘레기’라고 불리는 남자

'레기'와 '라이' 꽃이 피었습니다.

"비 올 거라서 자기 아팠나 봐."

단톡방 이름이 무려 '미녀삼총사'인 직장 동료 두 명과(그렇다, 나까지 포함해서 미녀삼총사인 것이다) 구내식당에서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해결하고 구내 카페 구석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카톡이 왔다. 1번 미녀가 쓱 보더니

- 애기? 애기가 누구, 남편?

하고 물었다.

- 애기는 무슨. 레기야, 봐봐요.

1번 미녀의 눈앞으로 휴대폰을 가까이 대고 발신자 명이 애기가 아닌 '레기'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 레기가 뭔데?

옆에 있던 2번 미녀가 물었다.

- 뭘 것 같아요? '쓰레기'에서 쓰 빼고 '레기'예요."

라고 크크 웃으며 답했더니 2번 미녀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그럼 남편의 휴대폰에 나는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를 물었다.

- 나? '라이'. 또라이."

두 미녀가 마시려고 집어 들던 커피를 내려놓고 푸하하하 웃었다.


친정 엄마는 질색을 하고 시부모님은 모르는 우리 부부의 애칭(?)은 연애시절부터이니 10년이 넘었다. 싸움 끝에 '이 쓰레기야!' '이 또라이야!' 하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려했지만 애정어린 호칭만을 남겼다. 이제와서는 무슨 일로 다툰 건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앞 글자를 떼고 '레기_라이'라고만 하면 원래 뜻과 달리 꽃 이름처럼 예쁘게도 들린다. '각 방을 쓰는 부부'이고, 나는 '손 맛 좋은, 깔끔한 아내는 아니'며 서로를 부르는 말조차도 '레기'와 '라이'이지만 우리는 오늘도 매운맛과 달달함 사이에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창 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종아리가 땡땡부어 베개를 쌓아 다리를 올려두어도 효과가 없을 정도로 아프고 불편해서 잠을 자지 못했다. 남편에게 이번 주에 혹시 비 소식이 있는지 봐달라고 했는데 없다고 했다. 눈썹달이 선명하게 보이는 맑은 겨울 밤하늘을 내 눈으로도 보았던 터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비가 안 와도 다리가 아픈 걸 보니 살을 빼야겠다고, 애먼 몸뚱이 탓만 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비가 내리고 있다니. 남편이 보낸 카톡은 지금 내리는 이 비가 아내의 다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인지하고서 보낸 것이다.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맞았다고 몹시 놀라워하면서. 마흔이란, 일기예보보다 날씨를 더 잘 맞추는 경지에 오르는 나이인가 보다.


- 그래도 쌤 걱정은 했나 보네.

내가 걱정되었던 것인지, 그저 신기해서였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으나 1번 미녀의 말을 믿어보는 걸로. 나보다 네 살 많은 그녀는 내가 남편에 대해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언제나 긍정의 에너지로 남편의 상황을 이해시켜주려고 한다. 그럼 또 희한하게 마음이 풀려서 회사 이야기 말고도 집안 이야기까지 자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여보, 자기, 당신' 중 무엇으로도 남편을 부를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부를 없는 호칭이 있다. 바로 '오빠'.

1,2번 미녀 모두 '오빠'인 남편과 산다. 1번 미녀의 '오빠'는 아내와 딸 사이 기싸움이 있을 때면 나서서 아내는 다독이고, 딸에게는 살짝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얼어붙은 공기를 슬며시 녹게 만드는 센스 만점 오빠이다.  2번 미녀의 '오빠'는 요리를 잘하는데다 '프로캠핑러'라서 주말마다 온가족이 집이 아닌 캠핑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두 명의 미녀들은 연상의 남자인 '오빠'가 주는 듬직스러운 이미지에 부합하는 남편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큰아들 노릇을 하려는 나의 남편이 아이와 말싸움하는 모습을, 때때로 다섯 살 아이의 논리적 발언에 반박하지 못하고 무참히 패배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내 처지와는 사뭇 다르다.


연하인 남편과 사는 내게도 완벽하게 유리한 점이 두 개 정도는 있다. 하나는 남편이 아이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준다는 점이다. 남편은 아이와 함께 건담 피규어를 조립하고, 망토를 두른채 칼싸움을 하고, 만화 주제가를 목청 높여 불러주는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둘이서 함께 놀이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것이 나의 행복이다.(남편의 짖꿎은 장난이 아이를 약 오르게 해서 눈물바람으로 놀이가 끝나는 날이 허다할지라도.) 또 하나는 우리 둘 다 정년퇴직을 한다고 가정하면(남편이 시험에 합격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남편이 무려 4년이나 돈을 더 벌어다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전업주부의 로망도 실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는 독립하고 없을 테니 긴긴 낮시간 동안 뷰가 좋은 제주 바닷가 카페에 앉아 온종일 책을 보고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제주 동쪽 어디쯤에 있는 작은 책방으로 늦은 출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이 연하면 어떻고 연상이면 어떠랴, 또 애칭이 애기면 어떻고 레기면 어떠랴. '레기'와 '라이'라고 서로를 부를 때 우리는 기꺼이 서로에게 '꽃'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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