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두 남자의 사랑싸움
부모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에게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있다. 쇼윈도부부로 가짜 행복을 연출할 재능이 없다보니 다정한 모습보다는 아무래도 투닥거리는 모습이 더 자주 연출되곤 한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하며 남편에게 너무 짜서 먹지 못한 파김치와 너무 달아서 먹지 못한 깍두기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달라고 당부했다. '음쓰'는 남편 담당인 데다 치과 진료가 있는 날이라 아침에 공부하러 나서지 않아도 되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편에게 잊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터였는데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기다리고 있는 건 싱트대를 꽉 채운 김칫통 2개였다, 벌건 고춧가루가 여기저기 묻어있는. "이왕이면 김칫통도 닦아두면 좋았으련만! 내가 못살아!" 날선 목소리가 거실에 꽉 들어찼다.
- 일부러 담가 둔 거야. 김칫국물 밴 거 빠지라고. 그리고 여보, 사랑해.
남편은 재빨리 내가 더 뭐라고 말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뒤이어 쏟아질 잔소리까지 신속하게, 본능적으로 막는 기술을 사용했다. 다시 보니 남편 말대로 한 번 헹구긴 한 모양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는데 무슨 잔소리를 더 할 수 있을까. 그저 까만자를 숨기고 흰자만을 이용해서 남편을 바라볼 수밖에. 그때였다. 옆에서 남편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가 한 마디 거든다.
- 별로 안 사랑하는 것 같은데?
남편이 보기 좋게 당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둘 다 현실 웃음이 터졌다. 아이도 아빠 엄마가 웃으니 덩달아 웃는다.
- 아빠가 엄마 사랑하거든! 엄마도 아빠 사랑하고!
남편이 아이를 상대로 유치한 사랑싸움을 벌였다.
- 아니거든, 엄마 1등 사랑은 나거든! 그렇지 엄마?
- 당연하지! 엄마 1등 사랑은 우리 아들이지!
우리집 사랑의 연결고리를 그려보자면 아빠 1등 사랑 < 엄마, 엄마 1등 사랑 < 아이 순이다. 아이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당연한 구도이지만 눈여겨볼 점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편의 1등 사랑은 아이가 아닌 바로 나라는 점이다, 진짜 속 마음은 모르겠지만.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는 동안 문제의 김치통까지 닦아서 엎어 두고 오랜만에 남편과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 여보, 우리 과장님 정말 웃긴다? 점심에 있지, 낙지볶음이랑 갈비탕이랑 둘 중에 뭐 드시겠냐고 하니까 '아무거나' 하는 거야. 그래서 그냥 낙지볶음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접짝뼈국' 맛있는데 아냐고 하시는 거야. 그럼 처음부터 그거 먹으러 가자고 하면 얼마나 좋아. 점심 뭐 먹을지 얼마나 고민했고만.. 그리고 우리 사무실에서......
회사에서 있었던 그저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아이가 후다닥 둘 사이를 파고들며 말했다.
- 엄마, 나 엄마한테 할 말 있어.
- 할 말? 뭘까?
- 쪽! (볼에 뽀뽀를 하더니) 이게 바로 할 말이야!
- 꺄악! 세상에나, 행복해라!
남편은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아이에게 졌다. 2연속 패다. 남편이 아이를 보며 말했다.
- 아들, 너 그런 말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 엄마 사랑하니까 그렇지! 좋으니까!
남편의 명백한 3패가 기록되는 순간이다. 오늘 남편은 뭘 해도 다섯 살 아이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치아가 하나 빠졌던 데 이어 또 하나가 빠졌다. 점점 더 형아가 되고 있다고 즐거워하는데 빠진 이 사이로 바람이 슝슝 들어가서 말할 때마다 발음이 줄줄샌다. 그 바람에 오히려 더 아가가 된 것도 같다. 거실에서 놀 때 자꾸 바닥에 엎으려 놀이를 하길래 저렴한 접이식 테이블을 하나 들여 소파 앞에 놔주었더니
- 엄마는 나한테 왜 이렇게 좋은 것만 해주는 거야?
하고 고마움을 표한다. 별것도 아닌 김치통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는 퇴근 후 일상이 아이로 인해 웃음으로 끝났다. 가뜩이나 사랑스러운 아이가 미치도록 예쁜 밤이다.
- 아들, 부족한 부모인 우리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