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가 제법 잘 아울려요?
남아선호 사상이 지금은 많이 옅어졌지만 예전에는 딸이라고 하면 낙태하는 경우가 많아 산부인과에서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을 때가 있었다. 궁금해서 애가 타는 부모를 위해 의사들은 아들이면 파란색 옷을 준비하세요, 딸이면 분홍색 옷을 준비하세요, 하는 식으로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 색으로 남녀의 성별을 구분하는 추세는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자아이의 옷은 푸른 계열이, 여자 아이들의 옷은 핑크 계열로 출시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당당히 말하고 싶다, 아들에게 핑크를 허하라.
새해 첫날 떡국 먹으러 시댁에 가는 길, 나와 남편의 드레스코드는 츄리닝, 아이는 핑크 상하복+형광 주황색 조끼+핫핑크색 양말이었다. 남편도 아이를 보고 멋쟁이라고 치켜세웠고 아이는 새로 산 양말이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9시가 다 되어 본가에 도착하자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못 본 사이에 더 형아가 됐다며 아이를 이리 안고 저리 안으며 궁둥이를 토닥이신다. 어머님 눈길이 아이의 양말에 닿았다.
- 야이 양말 무사?
아이에게 양말을 왜 이런 걸 신겼느냐는 어머님의 말씀에
- 새 해라서 힘 좀 줘봤어요.
하고 웃었다.
- 할머니, 여기에 눈알도 있어요. 봐봐요, 멋있죠?
발목에 그려져 있는 웃는 얼굴 그림을 보여주며 따라 웃는 아이의 모습에 어머니도 멋지다고 맞장구를 쳐주셨다. 이번에는 아버님이, 다음에는 시동생이 차례로 아이 양말을 보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남자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분홍색 양말을 신었다는 것이었다. '핑크 양말이 어때서?' 하고 대꾸를 하려던 차에 어머니께서 나서셨다.
- 새해라서 힘 좀 줬댄 햄수다! (새 해라서 힘 좀 줬다고 합니다!)
갓난아이에게 취향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으니 아이의 옷은 100% 엄마 성향이 반영된다. 나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핑크색 계열의 남아 옷에 눈길이 갔다. 내복이며 상하복을 핑크 계열로 입히면 아이가 더 환해 보이고 내 마음도 화사해졌다. 물론 지금은 아이와 함께 옷을 고르고 아이도 입겠다, 입지 않겠다 분명한 자기 의견을 밝히지만 태어나면서 핑크에 익숙해져 그런지 분홍색은 여자 색이라는 편견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칼싸움은 남자 놀이, 인형놀이는 여자 놀이 혹은 긴 파마머리는 여자 머리, 짧은 머리는 남자 머리 라며 구분하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스코틀랜드에서는 남자도 치마를 입는다고 알려주고(요즘은 노홍철 님이 치마 입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기도 한다), 숏커트를 한 '안산' 선수가 당차게 활사위를 당기는 사진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자랐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물론 핑크색 옷을 입힌다고 해서 아이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5세만 되어도 어린이집에서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따로 논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소변보는 자세가 다른 것도 뚜렷하게 인지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은 신체적 차이일 뿐 그 밖의 모든 영역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이며 사람과 사람으로서 서로 돕고 화합하는 관계라는 것을 아이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집에서는 남편이 라면도 끓이고 설거지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는 등 집안일하는 모습이 익숙하지만 시댁에만 가도 상황은 조금 다르다. 어머니가 밥을 하시는 동안 아버님과 남편, 시동생은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다. 할 줄 아는 게 없는 나는 눈치 보며 거실과 주방을 왔다 갔다 하긴 하지만 주방에서 메인은 시어머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남편과 시동생은 상을 펴고, 행주로 닦고, 숟가락 젓가락을 놓고 반찬을 가져다 나르는 보조적 역할에 그친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설거지는 본격적으로 며느리인 나의 차지이다. 그나마 시댁은 제주에서는 꽤나 진보적인 편에 속한다. 어제는 식사를 빨리 마친 아버님께서 직접 커피를 타 드셨다. 물론 며느리 커피까지 타주시는 경지에는 오르지 못하셨지만 엄청난 발전임은 분명하다.(전에는 며느리인 내가 커피 담당이었다.) 명절에는 음식을 같이 준비하고, 설거지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담당을 정한다. 하나밖에 없는 손주가 귀하디 귀할 테지만 상에 남아있는 컵이나 접시를 한 개씩 주방으로 나르도록 시키기도 하신다. 조만간 상에 숟가락 젓가락 놓은 일은 아이의 일이 될 듯싶다. 두 팔 벌려 환영이다. 아들이라고 해서 해 준 음식을 받아만 먹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는 않다. 요리는 나도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라서 아이에게도 바라지 않겠지만 식사를 마친 후에 자기가 사용한 그릇은 자기가 씻어 엎어두는 것, 자기 방을 정리하는 것, 건조를 마친 빨래는 개켜두는 것 등의 생활 교육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부모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것이므로 아빠 엄마의 적극적 공조를 필요로 한다.
핫핑크가 잘 어울리는 남자,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남자, 여자 마음을 여자보다 더 잘 아는 남자, 긴 파마머리가 잘 어울리는 남자, 세상에 더 다양한 유형의 개성 넘치는 남자들이 넘쳐나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여리여리한 여자 이미지 대신 전구를 스스로 교체할 수 있는 여자, 회사에서 당당히 임원으로서 억대 연봉을 받는 여자, 쌀 20킬로쯤은 거뜬히 들 수 있는 여자 등등 여자들의 모습도 달라져야 할 테다. 남성과 여성의 다름을 인정하는 만큼 나와 다른 '너'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길 희망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기를 소망한다. 지금도 예전에 비하면 조금 더 공정하고 조금 더 평등해졌지만 다양성에 대해서는 퇴보한 느낌도 든다. 좀 더 욕심을 부리고 싶다. 핫핑크 양말에서 시작된 나의 마음의 소리는 영향력이 미비하지만 같은 바람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계실 부모님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든든하다.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핫핑크는 그저 핫핑크일 뿐이다, 남자와 여자가 끼어들 틈이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