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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Jan 11. 2022

선생님, 내일은 또 무엇을 배우게 해 줄 건가요?

슬기로운 한글생활

2022년 3월, 올해 여섯 살이 된 아이가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치아는 앞니 아래쪽 두 개가 빠졌다가 다시 나고 있고 키와 몸무게는 웬만한 초등학생 엉아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지금 당장 가방 매고 학교로 간다 해도 어색함이 1도 없어 뵌다는 지인들의 말처럼 감사하게도 아이는 뿌리 튼튼한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자기주장도 똑 부러지게 하고 잘못한 일에는 쿨하게 사과도 곧 잘하는 꼬마신사이다. 내 뱃속에서 이리 귀한 생명체가 나왔다는 게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공룡은 3세에, 카봇은 4세에, 신비아파트는 5세에 섭렵하고 요즘은 어몽어스 피규어에 한창이다. 놀이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진심인 아이를 그동안은 적극 지지해왔기에 공부나 학습지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는 게 아이의 할 일이라고 굳게 믿어왔는데 너무 빨리 가는 시간을 탓해야 할까? 벌써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자 어린이집과는 다른 부담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제야 숫자를 열까지 정확히 샐 수 있고 1부터 10과 하나부터 열까지의 관계를 안다. 헷갈려하긴 하지만 스물, 서른, 마흔 등의 원리도 깨친 것처럼 보인다. 아빠나 엄마 모두 숫자와 친하지 않으니(둘 다 문과이다) 아이가 숫자 익힘이 빠르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한글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나는 여섯 살 때 이미 혼자 앉아 책을 읽었다.(고 한다.) 터미널에서(옛날엔 '차부'라고 불렀다.) 장사하느라 바쁜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책을 읽어준다거나 한글을 알려줄 수 없었다. 엄마도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내가 간판이나 신문에 있는 글자를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어린이집에서 배우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내가 즐겨 책을 읽는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아이도 책 보는 것을 좋아하겠다고 묻지만 엄마와 아이는 엄연히 다른 개체일 뿐이라고, 아이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답해왔다. 그런데 슬슬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과 관계없이 이제는 한글을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어린이집에 함께 다니는 '윤이 누나'는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하고(5-6세 합반에 재원 중이다) 동갑 친구들 중에서는 다행히(?) 아직 한글을 익힌 아이는 없는 것 같다.


아이 한글 공부는 언제가 적기일까? '한글 공부 시기'로 검색해보니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았다. 보통 4세 전후로 한글 학습지를 시작하려고 지역 맘카페 선배맘들에게 묻는 글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6세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더욱 마음이 초초해진다. 주변은 어떤지 한번 둘러보다 얼마 전 일요일에 당직 근무를 함께 하던 팀장님한테 물었다.

- 팀장님네 둘째 이제 3학년인가? 한글 어떻게 공부했어요?

- 한글? 우리 아들은 세 살 때 다 뗐어.

'세 살? 에이. 뻥이 심하시네.' 하고 속말을 삼키려는데 휴대폰 영상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영상 속 세 살 아이는 띄엄띄엄이지만 누나와 함께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맙소사. 공부 방법이 궁금해졌다.


- 공부로 접근하지 말고 놀이로 접하게 해 줘. 낱말카드 있지? 우린 그걸로 게임하듯 했어. 단어 찾아오기나 '가' 글자를 책에서 찾아 동그라미 치기 같은 거.

게임? 우리 아이에게 게임은 어몽어스 카드게임이 전부인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건 아닐까? 싶으면서도 세 살에 한글은 뗀 경우는 흔하지 않은, 한글에 특출 난 아이로 여겨졌다. 위로 누나가 있으니 누나를 따라 하면서 빨리 익혔을 수도 있고, 그때 팀장님은 육아휴직 중이었으니 아이와 한글을 도구로 놀이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조건(일하며 육아하기)의 다른 평범한 예시가 필요했다. 얼마 후 점심시간에 미녀 3총사에서 2번 미녀를 맡고 있는 동료와 식사를 하다가 물었다.


- 샘, 샘네 애기 한글 어떻게 공부시켰어?

- 우리? 나는 신경 하나도 안 썼어. 유튜브 보더니 알아서 다 읽고 쓰고 하더라고. '한글이 야호!'였나?

뭐라고? 유튜브 보니까 저절로 알았다고?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아이를 티브이 앞에 앉히고 유튜브로 <한글이 야호>를 검색해서 틀어주었지만 아이는 금세 딴짓하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 엄마, 재미없어.

- 엄마는 재밌는 거 같은데? 한글 배우면 엄마랑 같이 책도 더 재밌게 보고 밖에 간판도 다 읽을 수 있어!

- 책은 엄마가 읽어주면 되고 간판도 엄마가 말해주면 되지. 안 볼래!


거실로 나가 다시 레고 책상에 앉아버린다. '흠, 어쩐다?' 휴대폰을 들고 다시 검색을 하니 <한글이 야호>는 시즌2가 2015-2016년도였고, 시즌1은 2008-2009년도였다. 2017년에 태어난 아이에게 너무 오래된 프로그램을 틀어주었나 보다.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2021년에 제작된 <한글 용사 아이야>가 보였다. 유레카! 용맹해 보이는 한글 용사 아. 이. 야. 가 나와 한글을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바로 이거야! 아이를 다시 불러 플레이해주었는데 어랏? 음악 소리를 들었는지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아이는 '아.이.야. 세 용사'의 율동까지 따라 추며 오프닝송을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이미 <한글 용사 아이야>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바로 모음 용사 ㅏ.ㅣ.ㅑ.
자음을 만나
함께 한글 만들지
뿅망치로
ㅏ,ㅓ,ㅗ,ㅜ
태극봉으로
ㅡ,ㅣ,ㅡ,ㅣ
부메랑으로
ㅑ,ㅕ,ㅛ,ㅠ
ㅏ.ㅣ.ㅑ.라면
어떤 한글도 문제없어
한글용사 출동!
한글 용사 ㅏ.ㅣ.ㅑ.

그러더니 후다닥 다시 거실로 나와 스케치북을 펼치고 바닥에 배를 쭉 깔고 누워서는 '아 이 야'를 서툴지만 비교적 정확히 써 내려갔다.


- 엄마, 똥그라미 완~전 똥그랗게 잘 그렸지?

놀라움과 함께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아이는 우려와 달리 이미 한글이라는 넓은 바다에 두 발을 담그고 있었나 보다. 막연히 엄마인 내가 가르치지 않았으니 아이가 모르고 있을 거라고 단정 짓고 어떻게 '공부'하게 할지 골몰하고 있었던 시간들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 많은 생각들이 일순간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고사리 손으로 쓴 서툰 글씨들>


어른의 기준으로 아이를 재단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잊었다. 내가 돌보지 않는 시간에도 아이는 스스로 자라고 있었다. 서툴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적는 모습이 대견해서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물론 아. 이. 야. 딱 그 정도가 아이의 한글세상 전부이고, 한글을 이미 다 깨친 아이의 친구들도 있겠지만 엄마의 조급함은 납작하게 누그러뜨려도 될 것 같다.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유치원에 가는 것뿐인데 무엇이 그리 불안해서 성급하게 '한글 공부'를 시키려했던 걸까?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다는 초심을 자꾸 잃어버리고 부모 욕심이라는 구실로 아이를 다그칠 뻔했다. 언제가 됐든 자연스럽게 아이는 본인의 필요에 의해, 본인의 의지대로 읽고 쓰는 법을 익히게 될 텐데 말이다. 나조차도 어떻게 한글을 배웠는지는 기억에 없으니 아이에게도 한글을 언제부터 알았는가는 인생에서 그리 추억할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에게 소중한 것은 부모인 우리가 아이를 사랑해주고 아이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아이의 눈을 맞추며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들일 것이다. 오늘도 아이는 어른인 나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선생님, 내일은 또 무엇을 배우게 해 줄 건가요?

<아이의 놀이는 계속 되어야 한다. 노는 것이 아이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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