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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Jan 19. 2022

비타민, 박카스, 비타500 보다 너!

정시퇴근, 육아출근이지만 너와 함께라면 괜찮아!

<블루, 초록, 핑크, 노랑, 갈색, 회색, 주황, 블랙, 샤이안, 레드, 화이트, 보라, 뼈다귀까지! 어몽어스 친구들, 가까이 보기 금지.>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미처 몰랐다. 약속도 약속이었지만 아이가 티브이를 넋 놓고 보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클레이를 꺼내 든 것이 발단이었다. '한글 용사 아이야'처럼 유튜브를 통해 배우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아이가 티브이 앞에 앉아 하하호호 웃을 때마다 아빠 엄마인 우리는 부모 노릇_함께 책을 읽어준다 거나, 몸으로 놀아주는_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따끔거리곤 한다. 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불편한 감정의 정체는 아이를 방치한다는 죄책감일 수도, 좋은 부모(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인가에 대한 고민들 중 지금은 상호작용을 충분히 해주는 부모를 좋은 부모로 본다)가 되고 싶은 욕심의 무게일 수도 있겠다.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어몽어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식지 않은 가운데 어몽어스 카드놀이, 어몽어스 레고 피규어, 어몽어스 색칠 공부까지 영역을 확장하더니 이제는 어몽어스를 직접 만들기로 한 마음먹은 모양이다. 여섯 살 된 아이에게 휴대폰을 쥐어주지 않을뿐더러 아빠나 엄마 둘 다 게임에는 취미가 없다 보니 아이가 어떻게 어몽어스 캐릭터를 알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마도 어린이집에 함께 다니는 형아들 중 더 큰 형아가 있는 아이들로부터 듣게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할 따름이다.


처음에는 어몽어스의 겉모습만 보고  '카카오프렌즈'의 '라이언'이나 '어피치' 같은 귀여운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게임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했다. 아이에게 게임 화면은 보여줄 수 없어 대안을 찾다가 레고를 조립해서 어몽어스 캐릭터를 만들고 에피소드를 구성한 형식의 스톱모션 영상들이나 클레이를 가지고 어몽어스 캐릭터를 뚝딱 만들어내는 금손 크리에이터들의 영상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는 흥미롭게 본 영상들을 예사로 넘기지 않고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데 관심이 많은 편이다. 지난 여름에는 <유라야 놀자>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야쿠루트에 식용 색소를 넣은 후 냉동실에 얼려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것을 보고는 집에서 똑같이 만들어 먹기도 했다. 먹는 기쁨보다는 엄마와 함께 만드는 시간이 즐겁고 놀이 과정에 본인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며 얻게 되는 성취감이 꽤나 큰 것 같아 웬만한 요구는 들어주는 편이다.

<알록달록 새콤달콤한 야쿠르트 아이스크림, 맛은 흠……>


아침 일찍 어린이집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과 하원 후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의 대화가 복사+붙여넣기였다.

- 엄마, 오늘 집에 와서(왔으니) 어몽어스 만들 거지?

- 눼.눼.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루 종일 클레이로 어몽어스를 만들 생각에 얼마나 설렜을지 짐작되었다. 그런데 월요일이었고(월요병도 아닌 월화수목금요병을 앓고 있습니다), 연말부터 연초까지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지출품의를 처리하는 것과 맞물려 재물조사까지 하루 종일 숨도 참아가며 일정을 소화한 탓에 꽁꽁 굳어있던 몸은 따뜻한 거실에 발을 디디는 순간 눈사람처럼 녹아내릴 것 같았다. 가방을 벗어던지고 욕실로 달려가 손을 씻으며 부르는 아이의 콧노래가 문 틈 사이로 들려왔다. '내일 만들면 어떨까?' 입술 가까이 삐죽 올라온 속마음을 가까스로 눌러 담고는 삐에로의 입꼬리처럼 잔뜩 힘을 주어 웃었다.


조물조물, 조물조물. 수영을 할 줄 안다면 잔잔한 바다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기분이라고 표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우주에 가 봤다면 무중력 공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저 편안했다. 부드러운 클레이를 손에 잡고 이리저리 굴리며 모양을 만들다 보니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손 끝에 생기가 돌고 소란스러웠던 상념들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내가 전체적으로 형태를 잡으면 눈을 붙이고, 다리를 만들고, 등 쪽에 산소통을 달아주는 건 아이가 담당했다. 자세히 보면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멀리서 보면 알록달록 귀여운 어몽어스 대원 12명과 임포스터의 공격을 받아 뼈다귀만 남은 대원 1명까지 총 13명의 어몽어스 대원들이 완성되었다.

-우와,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잘 만드는 거야?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칭찬은, 그것도 여섯 살 된 아이가 마흔 하나인 엄마에게 해 주는 순도 100%의 칭찬은 양 어깨에 타고 있던 '피로'라는 '곰' 마저도 너끈히 물리칠 만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우루사' 광고를 모르시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피로야 가라!) 애쓰지 않아도 웃음이 절로 나고 비타민이나 박카스, 비타 500 같은 피로회복제 없이도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을 외치는 에너자이저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아이의 만개한 웃음꽃에 약속을 내일로 미루고 싶었던 마음이 머쓱해진다. 이번에도 아이는 완성된 결과물 보다도 엄마랑 함께 놀이를 했다는 경험치를 기억에 각인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추억 서랍에 차곡차곡 시간이 쌓일 수 있도록 나는 핫둘핫둘 체력을 길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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