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현실을 아는 것이 친구
우리가 우정을 맞이하는 모습은 어떤가. 혹은, 우정을 떠나보내는 모습은 어떤가. 아니면 우정과 함께하는 모습은 어떻고. 시나리오로 읽는 영화는 처음이라, 아무래도 낯섦이 너무 커서인지 어떤 감정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확실히 책보다는 영상이 더 크게, 하지만 작게. 너무 작아 치밀하게, 날카롭게 마음에 파고들었다.
내게도 친구가 있다. 워낙 인간관계를 넓게 가져가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그렇게 많다고 하긴 어렵다. 대신 나름 깊다는 말에는 자신감이 붙는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그 친구 역시 나와 같이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1~2년 연락 없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내 부탁만 하는 것을, 서로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가.
고3 시절. 민영과 정희, 수산나는 삼행시 클럽으로 끈끈한 우정을 이어가지만, 수능을 앞두고 잠정적 중단을 협의한다. 수산나는 하버드, 민영이 대구대학에 합격한 것에 반해 정희는 아무런 뜻도 없는 수능은 그냥 포기한다. 단단한 현실도, 뚜렷한 미래도 그릴 수 없는 정희는 '테니스의 왕자'라는 만화에서 본 왕자를 찾기 위해 테니스장에 알바로 취업하고, 그곳에서 수능 때 시계를 빌려준 인연이 있는 정일을 만난다.
하지만 테니스장은 애초에 알바를 쓸 정도로 여유가 없었고, 등을 돌린 채 해고 통보를 받은 다음 날 대학에 다니던 민영에게 하룻밤 놀러 올 것을 제의 받는다. 정희는 그때, 아직 자신이 머무른 시절에 민영과 함께 했던 추억을 바리바리 싸들고 민영을 찾아가지만 민영은 오로지 C-가 나온 성적표를 수정하기 위한 메일을 쓰느라 노트북만 쳐다볼 뿐, 정희는 신경 쓰질 않는다.
참던 정희는 결국 폭발하고, 서운한 감정을 쏟아낸다. 잠시 잠깐 민영과 전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민영은 쪽지 하나만 남긴 채 성적표를 수정하겠다며 정희를 자신의 집에 홀로 두고 대구로 떠나버린다.
정희는 혼자 남아, 민영과 함께 하길 바랐던, 그 시절 미래의 일로 미뤄뒀던, 그리고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일들을 하나 둘 시도한다. 그러던 중 숨겨진 민영의 일기장과, 자신의 그림과 같이 민영 역시 불가능하리라 여기는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말처럼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각자의 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드디어, 혹은 성인이 되고 나서 각자 살아온, 서로가 모르던 각자의 사정이 있는 각자의 현실을 알게 된 후의 성적표를, 정희가 채점한 김민영의 성적표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나이가 있어선지 내용 자체는 심하게 풋풋했다. 물론 핵심을 찌르는 부분은 있었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나의 친구들은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일까. 그들이 내 우정을 채점한다면, 어떤 성적표가 나올까. 혹은, 나는 내 친구들에게 어떤 성적표를 줄 것인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내 친구들은 나와 같은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각자의 사정이라고 해봤자 뭐 얼마나 난해 했겠는가. 기껏해야 담배나 성적, 혹은 여자 친구 같은 너무 얕아 모든 일들에 발을 담가도 서로에게 깊이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문제였다. 각자의 현실이랄 것도 매한가지.
하지만 성인이 되고, 대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학부터는 서로가 다른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가 크면서 각자의 사정 역시 생겨났고, 그 사정이라는 것은 점점 더 어른의 '그것'이 되면서 서로 거리낌 없이 나누기 힘들어졌다. 대학은 우습다. 사회에 나가면서 격차는 더 커져버린다. 이제 쉬이 입을 열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그래서 더욱 정치 이야기가 늘어난 것이 아닐까.(씁쓸)
이 책의 주인공들은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정희는 민영의 사정을 알게 되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과 민영은 정희의 성적표를 받으면서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 돌아보고 점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허구라도, 앞으로 정희와 민영의 우정이 서로의 세계와 사정, 현실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우정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본 서평은 서평단 참여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증정받아 작성하였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적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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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셋방살이 중입니다. '작가의 서재' 방만 제 관할입니다. ㅠㅅ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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