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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gi Sogi Sep 21. 2020

무엇을 비운단 말인가

비우는 것에 관한 어떤 투박한 생각 한 조각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무언가 특정 생각을 하게 되면 계속해서 우연한 계기로 그 생각을 강화시키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그 이전에는 그와 관련된 생각을 전혀 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는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그에 대한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다.      


예를 들면 스케이트보드에 대해 평소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tv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을 봤다던지, 지인으로부터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던지)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고 해보자.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정보는 그에게 있어 별날 것 없는 정보이니 처음에 그는 그 정보를 흘려들을 것이다. 근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 스케이트보드와 관련된 정보를 그 사람은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다. 거리를 걷다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유난히 많이 보게 되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데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광고를 접하게 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화 주제가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등 말이다. 분명 살면서 수십여 년 동안 스케이트보드에 대해 관심이 없던 그였지만 이렇게 갑자기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정보를 자주 접하게 되니, 그 사람은 어느새 스케이트보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소수의 특정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현상으로, 심리학에서는 이미 이와 관련된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상당한 분들도 이런 경험이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해서 신기한 기분을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최근 이와 관련된 상황이 하나 있어 (신기한 마음을 담아) 여러분에게 소개하며 오늘의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하루는 밥을 차려 놓고,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를 틀었던 적이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메인에 성철스님에 대한 영상 하나(채사장 유니버스 채널의 '채사장이 정리해주는 논란의 성철 스님 어록' 영상)를 띄워 주었길래 관심이 가 밥을 먹으며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30분이 넘는 영상이었는데, 주제 자체가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앉은자리에서 영상을 거의 끝까지 보고 있을 때였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수리 PD님께서 영상을 마치는 소감을 말하며 요가에 대한 언급을 하시는 게 아닌가.


"제가 최근에 읽었던 글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나는 원래 헬스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헬스를 하면 몸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헬스를 하다 보니 오히려 몸이 안 좋아지더라. 그래서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를 시작하고 나니 몸이 나아지더라.' 그래서 무슨 차이가 있지, 하고 보니까 헬스는 근육이라던가 채우는 데 그 목적이 있고 요가는 버리는 데 있다고 글쓴이는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버리고 나니 건강을 되찾았다, 라는 글을 제가 봤거든요." (이후 이독실님이 "지금 그럼 전국에 수백만의 헬스인을 매도하는 것이냐"라고 물었고 이에 당황한 수리 PD님은 "저는 채우는 게 좋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웃음을 자아냈다.)


최근 들어, 나는 일상생활에서 이상하게 요가와 관련된 정보를 많이 접한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한명의 요가 수련자이고 또 요가강사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 요가에 대한 정보를 주체적으로 수집하는 부분도 있지만, 최근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에서도 (가령 밥을 먹으면서 성철스님에 대한 영상을 보는 순간처럼) 요가에 대한 정보를 자주 접하는 것이다. 이런 정보들은 나로 하여금 하나같이 요가의 '비움'에 대한 관점을 고민하게끔 만들었는데, 영상의 저 부분은 그 고민의 정점을 찍은 것이었다.





Yogas citta vrtti nirodhah  요가는 마음작용(생각의 흐름)을 없애는 (혹은 멈추게 하는) 것이다.
요가수트라 1장 2절




요가학파의 창시자이자 <요가수트라>라고 불리는 요가 경전을 집필한 파탄잘리는 요가를 위와 같이 정의하였다. <요가수트라>의 가장 첫 구절인 1장 1절은 '지금부터 요가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한다', 이고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저 구절인데 1장 1절은 사실상 '가르침의 시작'을 알리는 용도로 기능한다는 점을 미뤄볼 때 1장 2절에 나오는 저 가르침이 실질적인 <요가수트라>의 첫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장 2절의 메시지는 파탄잘리가 요가 수행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요가수트라>는 이후 저 1장 2절의 가르침을 부연 설명하기 위해 상당량을 할애하게 된다.


무엇을 비운단 말인가. 파탄잘리는 말한다. 마음의 작용을 비워야 한다고. 마음의 작용을 비우면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 이를 수 있고 집착하지 않음에 이르면 프라크리티(현상 세계)를 극복하고 아트만(절대적 진리 혹은 참자아. 성리학에서의 理, 플라톤이 말하는 Idea와 유사한 개념이다. 아트만은 다른 말로는 푸루샤 혹은 브라흐만이라 하는데, 파탄잘리는 그중 푸루샤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그렇구나,' 공부를 하며 생각했다. 그렇지만 축구를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필드로 나가 현란하게 경기장을 누빌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요가 사상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가 '무엇을 비운단 말인가'에 대한 물음을 전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저번 주, 아쉬탕가 수업을 준비하다 일순간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을 마주했다.



아쉬탕가는 요가의 정통적인 성질을 강조하는 엄격한 장르의 요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임의로 시퀀스(수업의 흐름)를 변경하지 못하게 어디서 어떻게 호흡을 해야 하는지, 호흡을 할 때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동작을 실시할 때 어디를 바라보고 몇 번의 호흡을 진행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 그렇기에 지도자가 수업을 새로 짜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프로그램이지만 문제는 내가 진행하고자 했던 수업은 '아쉬탕가 베이직'이라는 이름의 1시간 프로그램이라는 것에 있었다. (요가원에 아쉬탕가 수업이 신설된 것이라 첫 수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프 시리즈를 진행한다고 해도 시간 관계상 상당 부분의 동작을 편집해야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는 부분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첫째로, 나는 요가원에서의 첫 번째 아쉬탕가 수업에서 회원님들께 아쉬탕가 요가의 매력을 제대로 전달해 드리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은 1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동작들을 수업에 넣게끔 만들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수업의 질은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혼자 수업 연습을 하면서도 말이 빨라지고 조급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에 나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두 번째로, 나는 나 자신의 실력에 대해 걱정이 되었다. 아쉬탕가는 본디 요가의 정통적인 성질을 강조하는 엄격한 장르의 요가라고 앞서 설명한 바가 있다. 그런 만큼 난이도가 상당한데 아쉬탕가는 수련자로 하여금 동적인 움직임과, 상당한 수준의 유연성, 그리고 힘을 요구한다. 내 머릿속의 나는 아쉬탕가 수련자이지, 아쉬탕가 지도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아쉬탕가 시퀀스의 많은 동작들을 소화하지 못하니까. 아쉬탕가의 수련자, 아쉬탕가의 지도자. 이 양자의 괴리가 내 안에서 또 다른 스트레스를 낳았다.


아쉬탕가 베이직 수업. 전날에 받은 스트레스는 없이 신나게 수업했다.


그러다 수업을 나가기 하루 전, 어김없이 수업 연습을 하던 중 '무엇을 비워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 '왜 나는 지금 여기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요가는 비우는 것이라고 하던데. 파탄잘리도 그렇게 얘기했고, 수리 PD의 입을 통한 그 글쓴이도 그렇게 얘기했다는데. 정작 나는 왜 비우지 못하고 자꾸 채우려 하는 걸까. 시퀀스를 억지로 뚱뚱하게 채워 넣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내 머릿속에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을 채워 넣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나는 이토록 무엇을 채우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비우면 안 되는 것일까? 비우면 탈이라도 나는 것일까?


그렇게 수업 전날, 시퀀스를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아쉬탕가의 골격을 해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범위 내에서 '아쉬탕가 베이직'이라는 수업 이름에 맞게 시퀀스를 최대한 담백하게 편집했다. 동작과 동작을 타이트하게 끼워 맞추지 않고, 그 사이에 여유롭게 동작을 설명하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새로 편집된 시퀀스로 연습을 해보니 내가 느끼기에도 수업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다음 날, 나에 대한 의심을 조금 내려놓고 가벼워진 시퀀스를 머릿속에 간직한 채 요가원에 들어갔다. 회원님들과 밝게 인사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자 오늘 같이 할 수업 아쉬탕가입니다"  "호흡할게요"  "다음 자세, 우티타 트리코나아사나"  "다리 간격 조금 더 벌려볼까요? 숨 멈추지 않습니다"  "좋아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어볼게요"  "좋습니다, 모두들 잘 하고 있어요" 세상에,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했다. 어쩌면 파탄잘리가 말한 그런 고차원적인 부분까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비운다는 건 지금 당장,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

'무엇을 비운단 말인가.'

오늘 한번, 이 질문을 스스로 되뇌어 보는 것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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