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지 않지만 진득한 사랑에 관하여
나에겐 반려식물 유월이가 있다. 드라세나 콤팩타라는 무시무시한 본명을 가진 그. 원산지는 동남아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프리카다. 그래서 더 맘에 든다. 아프리카의 원시적 소울을 그대로 머금어서 그런지 매우 튼튼한 아이다. 물을 제때 주지 않아도 시드는 법이 없다. 다만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인지 한쪽으로 심하게 휘어버렸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지 못한 게 내 탓 같다.
유월이는 백화점에서 데려왔다. 한참 방안에 무언갈 채우기 바쁠 시즌이 있었는데 지나가다 유월이를 보고 ‘내 거다.’라는 운명적 느낌이 들어서 데리고 왔다. 무언갈 키우길 두려워했던 내가 느낌을 팍 받은 거라면 운명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무언갈 키우고 책임감을 느낄 대상이 생겨서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유월이는 나에게 말을 걸진 않으니까 부담감이 덜했다. 말을 걸거나 산책을 해달라고 조르거나 운다면 그를 쉽게 데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겁쟁이니까. 그런 책임감, 부담감으로부터 늘 회피하길 원해왔으니까.
유월이는 나와 그렇게 두 해 정도를 함께 보냈다. 그에게 작은 무민 친구도 선물해 줬다. 무민이 옆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주려나? 나는 아주 방치하는 주인이다. 어쩌다 잎이 마른 거 같으면 물을 줬고 아주 가끔씩 그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다.
유월이는 매우 튼튼해서 나의 무관심과 상관없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뼈대가 휘었지만 잎사귀는 새롭게 피어났다. 분갈이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는 게 이리저리 바빠서 그 핑계 때문에 아직도 하지 못했다.
주인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또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유월이는 묵묵하게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존재를 거의 대부분 인식하지 못했다. 심지어 마음이 힘들 때 유월이가 목마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의식적으로 물을 주지 않은 적도 있다.
정말 나쁜 반려인이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내 옆의 생명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핑계다. 그냥 모든 세상이 나와 함께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유월 이를 내버려 뒀다. 얼마나 그동안 목이 말랐을까? 하지만 그는 튼튼한 친구이다. 그렇게 또 묵묵히 기다렸다.
마침내 내 마음의 우울함이 어느 정도 가셨을 때 비로소 유월이를 보았다. 그때 얼마나 미안하던지…. 내가 죽고 싶다고 내 손에 달린 생명 하나를 죽이는 건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유월이에게 처음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흠뻑 물을 주었다. 내가 물을 주지 않는 동안 튼튼한 유월이가 죽었을 리 없겠지만 마음의 힘듦 때문에 그 아이를 돌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대단한 게 아니라 눈에 밟히는 무언가구나. 눈에 밟혀야 사랑하는 거다. 대단한 설렘, 폭발적인 감정이 아니라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것,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끝까지 보살피는 것 그것 자체가 사랑이라고 느꼈다. 난 유월이를 방치했고 심지어 함께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끝끝내 그러지 못한 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절대 매정하게 돌아설 수 없다. 그 존재가 눈에 밟히고 안쓰럽고 신경이 쓰인다.
버린다는 건 어쩌면 생명이 생명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다시 유월이를 인식하고 사과하고 또 아껴주었다. 묵묵함으로 내게 꾸준한 사랑을 보여준 유월이.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나는 충분히 그를 사랑하고 그가 신경 쓰이고 심지어 보고 싶기도 하다. 내 공간에 유월이가 없다면 아마 이만한 위로와 채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거창한 게 아니라 눈에 밟히는 감정 같다. 적어도 눈에 밟히면 쉽게 포기하고 버릴 수가 없다. 그것만으로 살아있다는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어떤 존재를 위로하고 채워주고 있는가? 내 눈에 밟히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도 누군가에게 늘 눈에 밟히는 사람이기도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리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쓰리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