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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Jun 20. 2024

마주하는 격동의 감정과 분쇄되지 않은 상황에 관해

'끝의 00'을 다시 떠올려보며

하루를 근근이 버텼다. 일도 많지만 사람일도 많다. 상처받을 구석은 왜 이렇게 늘어나고 나의 마음은 왜 이토록 여린가. 더 이상 함부로 내 인생에 누군가를 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행복이 보장된 길이라고 믿었지만 그 믿음 어김없이 산산이 부서지기 마련이다.

실망스러운 일들이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많이 일어났다. 그들은 왜 나에게 그토록 가혹했을까? 모든 사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그럴수록 자꾸 그러면 안 되는데 마음속에 칼을 품게 된다. 사랑은 믿는 만큼 일어나는 일이라는 명언을 되뇌며(내가 만든 것이지만) 마음을 다독여 보지만 칼은 쉽사리 무뎌지지 않는다.

나쁜 일이 일어나서 나쁜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건데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 신이 있다면 나를 조금 더 단련시키기 위함일까. 

힘들 땐 나도 모르게 신에 대해 생각한다. 내 소설은  그 생각에 관한 것이다. 사랑에 대한 나의 염원을 담아낸. 영원히 잊자고 마음먹으면 사랑은 사라지는 법이고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영원히 기억하자고 마음먹으면 사랑은 계속되는 법이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나의 소설과 다르게 나는 잊기를 소망하는 사랑을 하고 있다. 소설은 그런 점에서 나의 이상이자 바람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이 세상 모퉁이 한 구석에 사랑이 있으리라 믿는 그 기대 때문에 인생이 힘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믿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나는 쉽사리 놓지 않는다.

잔인한 일이다. 바람은 늘 부서지고 사랑은 늘 삶을 지나치게 어렵게 만든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사랑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쉽게 되는 사랑을 보면 마음이 아리다. 이럴 때 쓴 글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열어보지 못하겠다. 열면 그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갈 것만 같아서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생각하면 답이 없다고 하는데 맞는 말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억울함 마음이 솟아나고 다시는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좋지 못한 사이클 같다. 나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생을 사는 사람에게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감정적일 땐 다소 객관적일 필요가 있다. 

다만 이 감정을 누르는데 반감이 생긴다. '그래 나는 사실 사랑이 어렵다. 그래서 아프다.' 이 이야기를 숨기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공표하고 싶다. 숨길수록 글은 병들고 어딘가를 명쾌하게 긁질 못한다. 부끄럽더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피하지 않으니 마주하는 격동의 감정과 분쇄되지 않은 상황들이 너무 많다.

비겁하게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닌가?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런 생각들은 아마 숙성되고 숙성되어 또 다른 글이 되겠지. 글이 무서운 점은 모든 걸 글로 생각한다는 거다. 그나마 이런 생각들이 버팀목이 되어준다.  힘든 감정조차 쓸모가 있어지니까. 이 쓸모 때문에 느끼고자 하는 건 아닐까라는 씁쓸한 생각도 해본다.

쓰는 숙명에 어울리는 삶은 무엇일까?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할까. 몫을 감당하지 않고 잘되는 법은 없을까? 질문이 질문을 물고 늘어진다. 



그는 생각했다. ‘고독한 삶은 영원한 성찰을 위한 토대일지 모른다. 신은 자신과 인간 사이에서 영원히 성찰해야 할 존재로 나를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에르는 황금빛 잉어를 통에 담고 나룻배를 저어 해변으로 나왔다. 그리고 터덜터덜 걸어 자신의 집 마당에 무지갯 빛 잉어를 심었다. 며칠 뒤 그 잉어가 무지갯빛 꽃으로 태어날 때쯤 에르의 집은 텅 비어있었다.
에르가 지구로 떠난 것이다. 그는 성찰자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아니, 그렇게만 남겨지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영혼이 지구인으로 살아갈 것을 강렬히 원했기 때문에 영혼의 부름을 믿기로 했다.

- 끝의 00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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