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복용 중단 이후 두 번째 병원 방문. 그리고...
ADHD+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요 며칠 무슨 얘기를 쓸까 많이 고민했다. 보고 있는 ADHD 관련 책이나 영상에 대한 얘기를 쓸까, 아니면 웃긴 에피소드를 쓸까 고민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건 지난주에 병원에 다녀왔다는 거였다. 그래서 오늘은 이 얘기에 대해 써 보기로 했다.
지난주 금요일에 병원에 갔다. 다시 약을 먹기로 결심한 후 두 번째 방문이었다. 오전 9시 반. 첫 타임 진료였다. 데스크 선생님이 지난번 진료가 끝나고 다시 체크했던 진단지에 누락된 부분이 있다며 마저 표시를 해 달라고 하셨다. 다 체크한 줄 알았는데, 놓친 게 두 문항인가 있었다. 그 사이에 부주의함이 심해졌나 보다. 진단지 체크를 마치고 데스크 샘이 호명을 해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께서 지난번 과제로 그날그날의 감정을 기록해 보는 걸 내주셨다. 근데 그걸 까먹고 안 했다는 게 진료실 의자에 다시 앉은 다음에야 생각이 났다.
"선생님, 지난번에 다시 진료받을 때까지 그날그날 감정을 기록해 보라고 하셨는데 과제 까먹었어요."
"그건 괜찮아요. 근데 지금 사실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상황이 더 많이 안 좋아졌는데?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앗! 정말요? 더 안 좋아졌다고요?"
"네. 화면을 잠깐 좀 보여줄게요. 여기 보면, 이게 처음에 왔을 때 기록지고 이게 약 그만 먹기로 할 때쯤의 기록지예요. 그리고 이게 최근. OO님이 보기엔 어떤 것 같아요?"
"아... 정말 더 안 좋아지긴 했네요. 오히려 처음보다도요."
병원에 다시 가기 전, 최근 들어 더 안 좋아진 것 같다고 예상은 했다. 건망증도 심해졌고, 정리정돈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단기 기억력이 더 약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을 새로 시작하면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약을 다시 먹기로 결심한 거였는데. 이럴 수가.
"주변 사람 눈치 보는 것도 심해졌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박 같은 것도 높게 나타나고 있어요. 요즘 잘 못 자죠?"
"네. 요 며칠 잠자다 자꾸 세네시쯤 깨긴 했어요."
"며칠이 아니고, 이 정도면 몇 개월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잤을 것 같은데. 내가 봤을 땐, 우울증이 온 것 같아요.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버틴 거예요?"
"네? 우울증이요?"
천성이 밝은 나였기에 우울증에 대해선 전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2017년의 그 끔찍한 사건 이후로 파산 면책을 받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가 우울증이었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지금은 우울증이 당연히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구나.
우. 울. 증.
세 글자가 머리에 박혔다.
땅. 땅. 땅.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못이라도 박는 것처럼.
"뭐 때문에 강박이 왔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지난 1년 동안 나는 약을 안 먹고도 비환자들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매 순간 가지고 살았다. 그때 선생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니 하루라도 빨리 부모님한테 진 큰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박도 꽤 크게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강박이 나에게는 오히려 약을 끊음과 동시에 서서히 잠식해 오고 있었고, 그게 ADHD 악화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음... 약 먹지 말고 버텨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가장 큰 거 같아요. 그때 약을 중단할 때만 해도, 저 약 이제 두 번 다시는 안 먹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우울증이라니, 충격이네요."
"지금은 ADHD 치료도 치료지만, 우울증 치료가 병행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먹고 있는 콘서타 36mg에 웰부트린 150mg이랑 서카딘 처방해 줄게요. 웰부트린은 항우울제고, 서카딘은 멜라토닌 같은 거예요. 수면 유도제. 오래 먹지는 않을 거고 우울증 증세 없어지면 이 두 개의 약은 뺄 거예요. 일단 3주간 약을 먹으면서 상황을 지켜봅시다. 분명 효과는 있을 거예요."
"네. 약 안 먹고 버티는 게 강박증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너무 무기력하고 힘들었던 게 그래서 그런 거였네요."
"네. 이 병은 호르몬 문제이기 때문에 약을 안 먹는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필요하다면 약을 먹으면서 치료를 받아야죠. 그래도 OO님은 병원에 올 용기라도 있었으니까 온 거죠. 병원에 다시 온 것만 해도 정말 잘한 거예요.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네. 앞으론 약 지속적으로 먹으면서 지금보다 좀 더 효율적인 삶을 살려고요. 이게 의지만으론 안 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돼서 어떻게 보면 다행이에요."
"이번 주 과제는 이걸 줄게요. 약 꼬박꼬박 제시간에 먹고, 밤에 자는 시간 제외하고는 눕지 않기. 누우면 무기력증이 도질 수 있으니까, 자는 시간 빼고는 눕지 않는 습관을 들여봅시다. 약은 3주 치 처방해 줄게요. 약효는 있을 테니, 꾸준히 먹어 봐요."
"네, 알겠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면서 오만 가지 잡생각이 다 들었다. 우울증이라니. 그것도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편으론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했다. 약 없이도 비환자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난 건가 라며 무의식 중에 스스로를 비하하는 생각까지 갔다가 맘을 고쳐 먹었다.
'우울증은 그래도 완치의 개념이 없는 ADHD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거잖아. 지금보다 더 나빠지기 전에 왔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ADHD도 내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약을 먹으면서 내가 이 병이랑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만들면 되는 거잖아. 너 그럼 도대체 왜 우울해하고 있는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완치가 될 순 없지만 이 녀석이랑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니까. 이 병을 극복하기보단, 약 40년간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이 녀석과 앞으로도 평생 동거 아닌 동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쿨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내가 ADHD 환자이긴 하지. 근데 뭐 어쩔 거야? ADHD 환자로서의 삶이 내가 선택한 삶은 아니지만, 약을 다시 먹기로 결정한 이상 그 결과에 대해선 내가 책임져야지. 약쟁이라고 비난하면서 내 맘에 돌 던지고 상처 주려고 용쓰는 사람이 있다 치자. 그럼 약 없이도 별 문제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보다 너는 더 의미 있고 멋진 삶을 살아가려고 다른 사람들의 10배 100배 1000배는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삶으로 증명해 보이면 되잖아. 익명성에 기대서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소모하는 사람의 삶과 중간에 우여곡절도 많고 실패를 자주 경험하더라도 조그마한 결과를 꾸준히 내는 걸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내 삶 중 누구의 삶이 더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인지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 나라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직장 잘 다니고, 할 일을 다 하면서 당당하게 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거잖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노력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약물중독자라고 폄하당할 이유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럼 앞으로 네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차근차근 보여주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야. 더 이상은 작은 이유 하나 때문에 신경 쓰거나 우울해하지 마.'라고 생각하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지금은 우선 우울증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마음과 정신이 누구보다도 건강해야, 앞으로 남들의 편견과 따가운 시선들을 견뎌낼 용기와 배짱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싸한 시선 한두 번 겪어 본 거 아닌데 뭘.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남들이 날 싫어하나, 회사 팀장한테 어리바리 타고 일 못하는 사람으로 찍힌 건가 라는 생각도 저어기 어디쯤에 있는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새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으니, 약을 먹고 일에도 익숙해지면 지금보단 낫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3주 후에는 그동안 나를 괴롭혀 오던 강박증과 우울증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의사 선생님으로부터도 많이 좋아졌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되려면 나부터도 더 이상 무기력함에 길들여지면 안 된다. 지금 당장, 뭐라도 해 봐야지. 포디, 오늘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