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어째 중간이 없니?

누가 나 집중력 조절하는 버튼 좀 달아줘요.

by 그럼에도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처음 A밍아웃을 했을 때의 반응이 생각난다. 페북에 공개하기 전이었는데, 그때 들었던 첫 대답이 이거였다. "언니,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은데? 집중력 좋지 않아?"였다.


하긴, 그렇게 느낄 법도 했다. 주변 사람들이 봤을 때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외국어를 공부할 때만큼은 집중도가 항상 최고조에 달했으니까.


그런데, ADHD 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거다. 비 ADHD인의 경우 싫은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참고 일할 수 있지만, ADHD 환우들은 그게 안 된다. 쉽게 말해서, 관심 분야에서는 비 ADHD인들보다 훨씬 더 집중을 잘 하지만 비관심 분야에선 집중이 안 돼도 너무 안 된다. 며칠 전에 내 단기 기억력이 3초라고 했던 걸 떠올리면 이해가 조금이라도 되려나.


나의 경우, 말과 글을 다루는 재주가 있는 편이라 지금처럼 글을 쓴다거나 외국어를 공부한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압도적인 성과를 낸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출근하는 시간을 이용해서 조금씩 쓴다거나, 회사에서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글을 쓰다 보면 실제로 걸리는 시간은 많이 걸려봤자 한 시간 내외. 지금 쓰는 이 글도 오늘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에이앱(www.a-app.co.kr: 성인 ADHD 블로거 모임)에 들어가서 무슨 얘길 써볼까 하고 뒤적대다가 한 가지에 꽂혀서 바로 써내려 간 거다.


이런 예를 또 들어보겠다. 최근 스페인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항상 그래 왔지만 남들 5일 공부하는 분량을 하루에 끝내버리고 남은 시간은 복습을 계속해서 머리에 박혀버리게 만든다. 그러니 결괏값이 비 ADHD인들과 차이가 날 수밖에.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전에 보험회사에서 3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업무가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아 한 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떠 오거나 하는 식으로 자리를 자주 비웠다. 그러지 않으면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게 너무 힘들어 어쩔 줄을 몰랐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또 분명히 누군가 업무적으로 도움이 되라고 해준 얘기를 듣고도 기억이 없다거나 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상반되는 집중력에 대한 예를 들기 위해 좀 더 어렸을 때로 돌아가 볼까. 난 중학교 다닐 때 학교 대표로 영어 영재교실에 가거나,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영어 경시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 오곤 했다. 언어적인 측면에서는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다는 거다. 반대로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수학, 과학은 공부하기 싫어서 요리 빼고 조리 빼고 하다가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맞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교에서도 과목마다 선생님들한테 평가가 갈렸다. 수학 과학 시간엔 맨날 자거나 딴짓을 해서 꼴통 소리를 들었는데 어문 계열 과목에선 선생님들이 "아, 그 외국어 잘하는 애?"로 기억하곤 했다.


이런 걸 보면 ADHD는 집중을 잘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ADHD 환자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집중력이 편향적으로 작용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갈라진다.


그리고 ADHD를 의심할 수 있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그 집중력을 자의로 조절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단적인 예로 나는 컬러링 북 앱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편이다. 생각하니까 또 하고 싶어 지는데, 앞으론 그 에너지를 글 쓰는데 투자하기로 나와 약속했으니 참겠다. 하지만 쉬는 날 아무것도 안 하고 게임만 하다가 휴일을 다 보낸 적이 꽤 있다. 중간에 멈추고 싶었지만 멈추질 못했다. 그러고 나서 몰려드는 자괴감은 컬러링 북 앱을 할 때마다 반복됐다. 그래서 지금은 핸드폰에서 컬러링 북 앱을 포함하여 게임과 관련된 앱을 다 삭제한 상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하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지니까.


비 ADHD인들이라면 '적당히 하고 딴 거 해야지'가 행동으로 이어지고, 자기가 원하는 타이밍에 중단이 되는데, ADHD인들은 그게 안 된다. 쉽게 말하자면 제어능력이 조금 더 부족한 거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이라든지 게임 중독, 흡연 같은 것에 빠지기도 더 쉽다. 그런 사람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게임이나 술, 흡연처럼 지나치면 나에게 크게 마이너스가 될 것 같다 싶은 것들은 가급적 멀리한다. 게임은 아예 눈에 띄지 않게 삭제해버렸고, 술은 한 달에 한번 마실까 말까다. 담배는 어렸을 때부터 입에도 대 본 적이 없다. 주변에 흡연자들이 "한번 피워볼래?" 해도 거절해왔다. 처음 한 번이 무섭지, 빠지면 얼마나 폐인으로 살아갈지가 눈에 불을 보듯 뻔히 보이니까.


만약 이 글을 읽고 계시는 구독자 분들께서도 나와 비슷한 증상이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한 번쯤 ADHD를 의심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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