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정신과를 다시 찾았다.
약 안 먹고 버텨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1년 전, 선생님께서 약 복용을 중단해 보자고 하셨다. 그땐 신났다. 약을 안 먹어도 된다는 건 그동안 시달려왔던 약의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처음엔 그게 암묵적인 완치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자기 관리만 잘해도 이 병을 이겨내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짧은 지식으로 인한 오해였다.
남들은 한두 시간이면 끝나는 정리정돈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넉넉잡고 하루를 소진했는데도 뭔가 X 누고 안 닦은 것처럼 뒤처리가 부실했다. 방이 폭탄 맞은 것처럼 난리가 났는데도 뭘 먼저 치워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저 여기에 있던 물건을 저기로 옮기는 것에 불과했다. 회사에서는 교육을 받는데 앞에서 강사님이 하는 얘기가 왼쪽 귀로 들어가서 오른쪽 귀로 나왔다. 머릿속은 텅 빈 상태로. 난 강사님이든 누구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다 귀담아듣고 기억하고 싶은데 그게 내 의지로는 안 된다. 미쳐버릴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겐 녹음이 필수다. 중요한 뭔가가 있다고 하면 녹음을 꼭 한다. 들으면서 메모도 하고는 싶으나 어제 잠깐 얘기했던 것처럼 의식의 흐름이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니 적다 보면 중요한 내용을 잊어버린다. 그것도 3초 내로. 누군가가 흘러가는 머릿속의 의식을 잡아서 어딘가에 못을 박아 고정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잠깐 약을 안 먹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도 했다. 다시는 약을 먹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약을 안 먹어도 비 ADHD인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근데 실제로 약 없이 살다 보니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기본적인 습관을 들이는 것조차도 너무 힘들었다. 머릿속에서 그리는,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진 모습이었는데 실제로는 마치 시궁창에 처박힌 것 마냥 될 대로 돼라 이런 모습이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또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엄청나게 비난하곤 했다.
'어쩜 결심해놓고 하루를 못 가냐.'
'이거 오늘까지 끝마치기로 했잖아. 근데 결국엔 또 못 했어. 너 이거 지금 며칠 째인지 알아?'
'진짜 오늘은 뭐라도 좀 했어야지. 쉬는 날이었고 시간도 충분했잖아.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자존감은 낮아질 대로 낮아졌다.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든 끊고 싶었다. 결국 부작용에 시달리더라도 약을 먹고 좀 더 효율적인 삶을 살아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어렵게 내렸다.
주변에서 종종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과 약 중독될까 봐 걱정된다고. 그러니 언젠간 약을 끊고 일반인들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1년 전이었다면 "당연하지! 꼭 그렇게 만들 거야!"라고 말했을 거다. 근데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다. 어떤 뜻으로 한 이야기인지 알기에 충고는 고맙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썩 와 닿지는 않는다.
고혈압 환자를 예로 들어서 얘기를 해보고 싶다. 특정 질환 환자를 겨냥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저 장기간 약을 복용하는 경우의 예를 든 것일 뿐이니 구독자님들이 오해하시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고혈압 환자는 꾸준히 약을 먹으면서 병을 관리한다. 그래서 약을 오래 먹은 사람들을 오히려 관리를 잘했다고 얘기한다. 이 ADHD라는 질환도 어찌 보면 비슷하다. 이건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완치의 개념이라는 게 없는 병이다. 특히나 성인이 되어서야 치료를 시작했다면 말이다. 그래서 약물 치료를 통해 꾸준히 관리를 해줘야 한다. 전두엽에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이라는 호르몬이 지속적으로 꾸준히 나와줘야 차분하게 집중을 하고 일의 순서도 정해서 착착 진행하는데 약을 안 먹으면 안 나오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약을 먹지 말고 정상인으로 살라고 말하는 건 ADHD 환자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이다.
모든 ADHD 환자들의 의견을 대표해서 얘기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라는 걸 미리 밝혀두고 싶다. 꼬아서 듣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난 그럼 비정상인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서글퍼진다. 겉으로야 약을 안 먹으면 정상인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ADHD 환자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정신과 약이니 오래 먹지 말라고 하는 건 조언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ADHD 환자가 정신과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약쟁이라고 비난하거나 색안경 끼고 볼 필요 없다고. 반대로 약을 먹는 사람이 먹지 않는 사람에게 약 안 먹고 버틴다고 해서 미련 곰탱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거라고. 그리고 이 병을 겪어보신 적 없는 비환자인 분들은, 반드시 약을 중단해야만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약을 먹는 사람은 먹는 사람대로, 안 먹는 사람은 안 먹는 사람대로 각자의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일 뿐이다.
ADHD 환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 당장 바뀌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이 병이 어떤 병인지에 대한 의식이 바뀔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장기간 약을 복용한다고 했을 때 고혈압 환자는 관리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반면, ADHD 환자는 약물 중독이네, 약쟁이네 하는 말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그 사람들이 먹는 약이 단지 정신과 약이라는 이유로.
그런데,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의사 선생님의 처방 없이 뒤에서 몰래 알음알음으로 약을 구해서 먹는 건 확실히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확정 진단을 받고 약을 먹는 환자들은 의사 선생님한테 이만큼은 먹어도 좋다고 하는 범위 내에서 합법적으로 처방받아서 먹는 거다. 그런 사람들한테 약쟁이라고 비난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다. ADHD 환자를 보는 시각이 지금만큼 차갑고 날카롭지는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