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왜 헌혈이 안 돼?
그동안 50번 넘게 헌혈했는데, 도대체 왜?
헌혈을 할 수 있는 나이인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헌혈을 해 왔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게 좋아서였다. 그렇게 해서 하나 둘 헌혈증을 모아뒀다가 나중에 주변에 헌혈증이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있는 헌혈증을 다 털어서 보내주곤 했었다.
헌혈센터에 가면 피를 뽑기 전에 간단한 혈액검사, 혈압 및 심박수 체크, 그리고 문진을 한다. 오늘 헌혈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종류의 헌혈이 가능한지에 대해 간호사님과 함께 짧게 얘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불가 판정을 받으면 집으로 그냥 가게 되는 거다.
난 참 건강하게 태어난 것 같다. 헌혈 문진 때 거의 대부분 들었던 대답이 "오늘 컨디션 너무 좋으시네요. 철분 수치도 그렇고 혈액 상태도 그렇고요. 준비되면 불러드릴 테니 화장실 한번 다녀오세요." 였으니까.
정말 가아끔, 아주 가아아아끔 "오늘은 철분 수치가 기준 미달이라 힘들 것 같아요. 다음에 와 주세요." 라며 한두 번 들었던 대답이 나에게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내 건강상태는 좋은 편이었다. 어렸을 때 있었다는 뇌수막염을 제외하고는 잔병치레도 없었고. 그래서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듯 심심하면 헌혈을 했다. 현재는 53회에서 멈춰 있다.
ADHD 약을 처음 복용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아마 2018년 초였던 걸로 기억한다-나는 여느 때처럼 헌혈을 하러 갔다. 문진 시에 약 먹는 게 있는지 물어보는 내용이 있어서 일단 YES에 체크를 하고 간호사님과 면담을 했다.
"여기 약 드시는 게 있다고 체크해 주셨는데, 어떤 약 드시고 계세요?"
"저 최근에 ADHD 진단받아서 콘서타 한 달째 계속 먹고 있어요. 혹시 몰라서 오늘은 안 먹었고요."
"아, 그러세요? 그럼 가능한지 한번 확인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간호사님이 돌아오셨다.
"음... 죄송하지만 약 계속 복용 중이신 거라면, 헌혈은 좀 힘드실 것 같아요. 약 중단하시고 6개월 이후에는 다시 헌혈하실 수 있으니까 그때 해 주세요."
"아, 안 되는 건가요?"
"네, 안타깝지만 이번에는 어려우실 것 같아요."
"네,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이 약은 먹는 당일에만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나는, 혹시 몰라 그 날만 안 먹고 간 거였는데 결국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하긴, 내 몸속에서 작용하는 건 약 하나로 당일에만 효력이 있겠지만 수혈자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때 이후로 약을 끊고 나서도 6개월 동안은 헌혈을 안 했다. 대략 2년 반. 오죽하면 적십자사였나 한국 혈액원에서 나한테 전화까지 했을까? 예전엔 등록헌혈까지 신청해서 주기적으로 헌혈 열심히 하던 사람이 갑자기 뚝 멈춰서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전화해 봤단다. 그런 건 아니고 성인 ADHD 진단을 받아서 약을 복용하느라 그런 거였다고 했다. 전화받던 당시에는 약 복용을 중단한 시점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수혈자 분을 위해서 6개월 지나고 다시 가겠다고 했다. 전화하셨던 분도 놀라시면서 나 같은 사람 처음 본다고 하셨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며 응원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6개월이 지나자마자 다시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듯 2주에 한 번씩 스케줄을 짜서 헌혈을 하러 다녔다. 그리고 그 사이에 50번을 채워서 금장을 받았다. 서랍을 열면 가끔 보게 되는 금장과 상장, 그리고 선물로 받았던 만년필 세트는 지금도 그때의 추억으로 나를 데려가곤 한다.
최근에 다시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헌혈은 중단한 상태다. 헌혈 때문에 사실 약을 다시 먹을까 말까 많이 망설였던 것도 어느 정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헌혈을 해주는 것보다 내가 좀 더 효율적으로 살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내 기준에서는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랜 생각 끝에 헌혈을 포기하기로 했다. 앞으로 50번 정도만 더 하면 적십자 명예의 전당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있었는데, 좀 많이 아쉽다. 그래도 그때의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멋지게 살려고 노력할 거다. 더 이상은 헌혈을 못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미련을 두지는 않으려고 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생기는 건 세상만사의 당연한 이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