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를 배운다는 것
남편은 프랑스에서 고교 시절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10년을 보낸 뒤였지만 한번 제대로 배웠던 말이라 그런지 다시 파리에 왔을 때 어려움 없이 불어를 했다.
그럼 나는? 출국 전, 프랑스어 학원에서 프랑스어 기초를 배워 간단한 인사말, 숫자, 단어 등등 우리가 처음 한글을 배우는 수준 정도의 수업을 듣고 용감하게 파리로 떠났던 것. 남편이 프랑스어 공부 잘 돼가냐고 물어보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하곤 했다.
말은 그 나라에 가서 배우는 거야
음... 지금 생각해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당시에 무모하고 오만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지금도 반은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나라에 가서도 저절로 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적어도 의사소통이 되는 정도까지는 해서 갈 것 같긴 하다.
파리에 도착한 나는 벙어리가 된 기분을 느꼈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때는 언어가 안 될 때의 불편함을 거의 못 느꼈다. 또 대화를 듣다 보면 대충 어떤 말인지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일단 나의 문제는 '듣기'보다 '말하기'였다. 혼자 있을 때면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래도 내 할 말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다니.
혼자 있는 상황에서 그런 날이면 스스로도 답답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럽고 눈물이 났다. ‘말 좀 더 배워서 올 걸, 무슨 패기였던 거야!’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 그렇게 몇 날 며칠 동안은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 아니었다. 그래도 배우고 싶었다. 파리에서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프랑스어가 꼭 필요했다.
이상하게도 어학원 선생님 앞에서는 이미 그들이 기다려줄 것을 알기에 천천히 말을 생각해내며 할 수 있었는데, 낯선 이들에게 내 의사를 전달해야 할 때는 말문이 막히는 것. 괜히 낯선 땅에서 주춤하게 되고, 어려운 상황이 싫어 남편에게 의지해보려 했다. 하지만 나의 남편은 아주 냉정했다. “말은 하면서 배워야 돼, "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나를 문밖으로 나가게 했다. 너무나 단호박이라 야속했지만 나도 알고는 있었다. 내가 혼자서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너무 자신 있게 말했다. “말은 그 나라에서 배우는 거야.”...
일단 해보자
꾸준히 프랑스어 과외를 하고, 어학원 수업도 들었다. 집안 곳곳에는 프랑스어 단어들을 포스트잇으로 붙여 두고 수시로 외웠다. 프랑스어는 연음이 많아 상대가 빨리 이야기를 하면 잘 들리지 않아 영화나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는 어린이용 영상들을 보며 간단한 대화부터 익숙해지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막상 프랑스인과 대화를 하려고 하면 외웠던 표현들이 바로바로 나오지 않고 버벅버벅. 대체 나 왜 이래?
말은 말로 배우는 것
그래서 파리에 있는 언어교환 모임에 나가보기로 했다. 한국어와 프랑스어를 배우는 언어 스터디 모임이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간 첫날,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을 보며 일단 놀랐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렇게 많구나. 한국인 유학생부터 직장인,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준비하는 프랑스인, 한국이 좋아 언어를 배우는 친구들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우정도 쌓는 자리였다. 나도 자리에 앉아 프랑스인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모임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을 참여하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중요한 건, 내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프랑스어를 말했다는 것!
스스로 '불어를 못하니까'라고 생각해버리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말은 용감한 사람이 잘 배우는 게 맞다. 못해도 괜찮으니 일단 뱉어야 하는 것이 말이었다. 언어교환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시간 날 때마다 카페에서 만나 또 공부했다. 만날수록 친해져 파리의 공원, 미술관을 함께 다니며 놀면서 말을 배웠다. 그렇게 했더니 집에서 혼자 단어를 외우며 공부할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실력이 나아졌다. 3년 차가 되었을 때는 혼자 다녀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난 불어를 잘 못하니까'라고 스스로 단정 지어버린 생각이 나 자신도 작게 만들었다는 걸 안다. 그 뒤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뭘 하든 용기가 필수 조건.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다. 하지만 언어는 하면 할수록 느는 것이 분명하더라.
주부가 되고 시작한 요리에 재미를 붙여 프랑스의 요리학교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그때부터 프랑스 요리 프로그램과 요리 책을 보며 언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좋아하는 분야의 단어와 표현들은 더 빨리 내 것이 되었다. 파리에 있는 요리 관련 매장, 미식 서점 등 현지인들이 주로 가는 장소들도 찾아가며 파리의 삶을 채워갔다. 말을 뱉지 못해 질질 짜던 내가 혼자서도 잘 다니고, 친구들이 오면 여행 가이드도 해주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공인 어학 시험도 패스했다. 스스로 칭찬에 인색한 편이지만 일취월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