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슬램덩크처럼 로컬라이징될 수 있다면

이상은 현실을 만나면 어떻게 혼종이 되는가?

by shotchuu

1.

오늘도 입버릇처럼 -한 반년쯤 절에 들어가 버리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매일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좇으며 살아가는 도시의 밥벌이에서 벗어나, 고요한 산속에 은거하며 마음을 비우고 싶다는 원념이었다. 물론 실제로 친구들과 템플스테이를 떠났을 땐, 마음을 비우기는커녕 새벽에 밀반입해 온 프링글스를 까먹으며 심야괴담회를 보긴 했다.


어쨌거나 나는 어려서부터 절 자체를 정말 좋아했다. 젊은 날 건축가였으며 생태운동을 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고건축과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인 사찰의 가치를 아이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셨고, 덕분에 나는 전국의 유서 깊은 천년고찰들을 꽤나 돌아다닐 수 있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낙산사의 홍련암과 거대한 해수관음상, 월정사의 전나무숲길과 백담사 계곡, 봉정사 극락전… 틈만 나면 장난과 과잉행동을 일삼던 어린 날의 나조차 그 오래된 공간들이 주는 기운에 늘 괜히 경건해지곤 했다.

가을의 청평사


2.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정체화하는 어른이 됐지만, 여전히 나에게 불교는 종교보다는 일종의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여져 있다. 소유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가르침. 우주와 인연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수행의 장. 나에게 불교는 일종의 천박한 세상에서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 같은 거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물질을 좇는 삶에 지칠 때면 아버지의 차를 타고 훌쩍 어느 산사로 드라이브를 떠나거나, 친구들에게 템플스테이를 가자고 꼬시곤 했다.


그런데 천박한 자본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찾은 안전지대 사찰에서도, 나는 언젠가부터 뭔가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위화감의 출처는 바로… 고즈넉한 산사의 돌계단 옆에서 나부끼는 ‘기와불사 3만 원부터~‘ 라거나 ‘합격기원 108배’ 따위의 직관적인 가격&보상 소구 카피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원래 108배 같은 건 욕망을 비우고 업을 덜고자 108 번뇌를 끊겠다는 수행인데, 언제부턴가 입시 합격 같은 특정한 목표를 기원하는 수단으로만 전락한 게 아닌지 싶었다. 그 고찰들의 수많은 기와와 연등에 적혀 있는 취업기원 창업대박 등등의 세속적인 욕망들이 자꾸만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했다. 아니 분명히 불교는 비움의 철학이라고 배웠는데, 절에 오는 사람들은 왜 더 채워 달라고 기도하지?

작년 여름 템플스테이에 가서까지 플랭크를 하던 친구들


나를 전국의 고찰에 데려간 장본인이자 나름 법명도 받은 불자인 나의 아버지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낸 적 있다. 조부의 49재를 지역의 유명 고찰에서 모시고, 49재가 이어지는 7주 내내 성실히 절에 방문해 스님의 불경을 들으며 기도하던 그는 막제 날 절을 나오는 차에서 말씀하셨다. “야 아까 그 대웅전에 헌금함 몇 개 있는지 봤어? 문 앞 부처님 양 옆 등등 세어보면 8개나 된다? 부처님이 돈을 좋아하는 걸까? 웃기지 하하하…“ 까지 하다가 정말 신실한 불자이신 할머니께 쿠사리를 먹고 그만두셨다.

듀…


그래, 부처님은 돈을 좋아하실 리 없다. 불교는 본래 무소유와 공의 철학이다. 이 모든 것은 한국에 자리 잡으며 이 땅의 뿌리 깊은 무속 및 기복신앙과 섞인 결과물이었다. 불교가 한국사회에 잘 녹아들기 위해선 이곳의 터줏대감 격인 샤머니즘과 제사문화를 흡수해야 했고, 한국의 사찰에 산신각이니 칠성각이니 기도비나 하는 것들이 생기게 된 것도 이런 이유인 거다. 지금의 한국 불교는 제사와 무속의 요소가 섞여 영업 콘텐츠의 역할만 쏠쏠히 하며 일종의 코리안 소울 종합 패키지가 된 거였구나… 그러니까 본래는 존재와 욕망을 내려놓으라는 철학이, 한국에서는 세속적 소원을 이뤄 주는 마법의 소라고동님으로 로컬라이징된 것이었다. 그걸 깨닫고 조금 어지러워졌다. 이거 완전히 태어난 목적과 정반대로 로컬라이징됐잖냐…

아버지 난 태어나지말아야했나요?

3.

하긴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은 정말 비일비재하긴 하다. 계급을 철폐하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유토피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주의였던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태어나고 100년쯤 후 정말 기묘하게 변형되어 북쪽 독재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어 독재와 착취의 도구가 됐으니까… 애초에 마르크스는 노동자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충분히 존재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정작 이 이념을 받아들인 국가들은 마르크스가 전제한 조건과는 동떨어진 농업 중심 국가였고, 이 이념은 당시 해당 국가들의 여건에 맞춰 몇 가지 부분들만 선취적으로 적용됨으로써 나름의 로컬라이징이 뚝딱 되었다. 노동자가 많지 않은 나라에서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노동자혁명이었던 거다. 이게 바로 홍철 없는 홍철팀.. 결과적으로는 부의 재분배와 계급 없는 세상을 주장하던 이론은 모두가 알다시피 당 독재를 위한 선전선동의 근거로 변질됐다.


사실은 최근에 소련사 책 한 권을 너무 흥미롭게 읽고 이 생각을 시작했다. 나는 사회과학을 전공했으나 전문가는 아니며 이 모든 건 우매한 개인의 견해라는 걸 밝혀둔다

뭐… 개인적으로는 알리오올리오를 로컬라이징한다고 냅다 소면부터 삶고 마늘 때려 넣으면 그건 마늘비빔국수지 알리오올리오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인 이론들은 왜 인간사회를 만나면 이토록 변질되고 마는 것일까? <슬램덩크>가 처음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올 때 주인공들 이름 기가 막히게 로컬라이징 되어 들어온 것처럼만 잘 변형되어 정착하면 좋을 텐데… ‘사쿠라기 하나미치’라는 이름이 ‘강백호’라는 찰떡같은 이름으로 로컬라이징 된 것처럼. 나는 슬램덩크를 볼 때마다 채치수 송태섭 서태웅 정대만부터 시작해서 김수겸이니 윤대협이니 전호장이니 황태산이니 변덕규니.. 이런 기가 막힌 이름들은 어떻게 지은 건지 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철학도 종교도 인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게 녹아들 수는 없는 걸까? 이 모든 이상적인 사유들이 현실세계와 섞일 때 정말 딱 슬램덩크만큼만 잘 로컬라이징 되었다면, 그럼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이름을 기가 막히게 지어놨으니 이런 명장면도 나왔으리라.



한 소녀의 명품 립펜슬이 바닥에 떨어져 같은 반 남학우의 채점용 색연필로 사용되었다는 유명한 일화처럼,,, 태어난 목적에 맞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사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사상에게도 참 가혹하다.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지만 현실은 욕망을 우선시하니까... 아무리 이상적인 가르침들도 인간 사회에 실제로 적용되어 현실패치가 되었을 때 혼종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은 거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정말 세상에 희망이란 없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4.

하지만 세상은 매번 진창 속에서도 더 나은 이상을 고민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변화해 왔다고 믿는다. 그리고 태어난 목적과 조금 다른 형태로 자라난 이상주의들도 현실에서는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다. 냉전 시대 내내 독재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쓰이는 수모를 당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기후변화의 시대인 지금 탈성장과 생태주의를 말하는 새로운 시각으로 시대에 맞게 다시 쓰이고 있으니까. 한국에서 토속신앙과 섞여 김피탕 같은 존재가 된 불교도, 많은 이들이 고된 세상살이를 견디는 힘이 되어 주고 있으니까. 실제로 요즘의 불교는 Gen Z 친화적인 브랜딩으로 젊은 층 사이에서 꽤나 핫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불교박람회가 재미있다고 소문 나서 젊은이들이 미어터지기도 했으니...


블랙 반가사유상과의 운명적 첫 만남

나도 이토록 뚱뚱한 글로 상업적 종교와 철학에 대한 진한 현타를 논했지만, 사실은 얼마 전 경주박물관에서 정말 예쁘고 힙한 블랙 반가사유상 굿즈를 구매해서 책장 꼭대기에 세워 두었다... 인센스를 피우고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바라보면 괜히 마음이 고요해지기도 했다. 가방에는 언젠가 민경이 법주사 템플스테이를 다녀와서 선물해 준 검은 목탁 키링이 여전히 달려 있다. 너 이런 거 환장하잖아. 민경이 목탁 키링을 주면서 했던 말이다. 그래... 환장하지. 이런 거에 환장하는 나를 보면 가끔은 내가 나한테 환장할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부처님이 어떤 남자아이돌 생카 컵 옆에 계셔도 괜찮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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