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벼운 플라스틱의 무게
내 방 책상 위에는 기묘한 대치가 벌어진다.
한쪽에는 수십 년의 시간을 견뎌온 보이차 잎과 정갈한 찻잔이 놓여 있고,
그 맞은편에는 무심하게 던져진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있다.
회사 로고와 내 얼굴이 인쇄된 사원증이다.
김영하 작가는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원증은 여행의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는 물건이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오늘 하루 얼마만큼의 가치로 환산되었는지를
단 한 장의 칩 안에 압축해 놓은 지독하게 친절하고도 비정한 증명서다.
사실 이 사원증이라는 사물은 꽤나 위선적이다.
무게로 따지자면 10그램도 채 되지 않을 그 가벼운 플라스틱 조각이,
아침 회사 출입구 앞에서는 천근만근의 무게로 변한다.
‘삑’ 소리와 함께 출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나는 일종의 ‘인격적 로그아웃’을 경험한다.
한 개인의 취향과 복잡한 내면은 출입구 밖 어딘가에 잠시 맡겨두고, 시스템이 요구하는 ‘효용성 높은 PM’이라는 아바타로 접속하는 것이다.
사원증을 목에 거는 행위는 그래서 일종의 구속이자 안도이다.
이 목줄이 나를 조직이라는 거대한 알껍데기 안에 보호해주고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동시에 내가 그 알 속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는 서늘한 구속감.
가끔 점심시간에 사원증을 목에 건 채 단체로 줄을 서 있는 동료들을 보면,
마치 어느 거대한 목장의 소들 같다는 이상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이 기분을 비슷하게 느꼈던 때가 있었는데,
그건 내가 입대하기 위해 받았던 신체검사에서이다.
신체검사 결과 최종 ‘1급’ 판정받았을 때,
마치 내 어깨에 ‘1++’ 최고급 소의 등급이 찍히는 기분이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지금 사원증을 걸고 있는 것도 이와 유사한 감각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목줄을 벗지 않은 채, 약속이라도 한 듯 식당의 메뉴들 중에서 먹고 싶은 점심 메뉴를 고른다.
사원증은 낮 동안 내 가슴 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사람들은 내 눈을 보기 전에 내 가슴팍의 로고와 이름을 먼저 본다.
그 로고가 주는 신뢰에 기대어 협상을 하고 프로세스를 짠다.
하지만 퇴근 후,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을 고르며 서 있을 때
거울에 비친 사원증은 유난히 생경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대단한 전문가로 만들어주던 그 카드는,
이제 퇴근길의 피로를 주렁주렁 매단 기묘한 장신구에 불과하다.
심지어 화장실 거울 앞에서 사원증을 뒤집어쓰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머리를 만지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이 사물이 얼마나 내 신체의 일부처럼 기생하고 있었는지 새삼 소름이 돋는다.
회사를 벗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 사원증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목에서 끈을 풀어내는 순간, 비로소 중력의 방향이 바뀐다.
시스템이 부여한 ‘사회적 나’라는 중력에서 벗어나,
오직 나만의 궤도를 도는 본질적인 자아로의 회귀다.
책상 위에 던져진 사원증은 이제 아무런 힘이 없다.
그것은 문을 열어주지도, 내 신분을 증명해주지도 못한다.
가끔은 책상 구석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너는 결국 나를 데리고 나가야 해"라며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니체는 우리에게 자신을 극복하라고 주문했지만,
사실 직장인에게 가장 큰 극복은 퇴근 후 사원증의 잔상을 지워내는 일이다.
사원증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했다면,
이제 내 책상 위의 찻잔은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다.
사원증이 타인의 시선을 가슴에 매다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그 시선들을 찻물에 씻어내야 할 시간이다.
오늘 당신의 목에 걸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을 증명하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을 비웃고 있는가?
퇴근 후 사원증을 벗어던지고 내면의 본질만 남기고 싶은 밤에
나는 내 사원증에게 정중히 작별을 고한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그 목축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원증의 칩 안에는 결코 입력되지 않을
나만의 시간과 나의 내면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