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욕망이었다
‘손목시계’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나는 가장 먼저 고급 손목시계들을 떠올린다.
20대의 나는, 내가 보던 유명 잡지 속의 고급 시계들을 선망하기도 했다.
마치 저 좋은 시계들을 차고 있으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다른 의미로 손목시계를 가지고 싶었다.
특정 브랜드를 원해해서라기보다,
그것이 ‘기계공학의 정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부품들이 맞물려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만큼 낭만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 정교한 톱니바퀴의 맞물림은
마치 행성들이 질서 정연하게 궤도를 도는 작은 우주를 닮았다.
이럴 때, 나는 내가 공대 출신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하지만, 2026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손목시계는
더 이상 낭만적인 기계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의 스마트 워치는 내 혈중 산소 포화도를 측정하고, 걸음걸이를 세며,
내가 어디서 얼마나 심장을 뛰게 했는지 기록한다.
당연하게도 나보다 내 신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가끔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타인에게 먼저 드러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어떤 시계를 차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형태로 말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모습인
‘페르소나’의 중요성을 말했다.
과거의 시계라는 사물이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차가운 가면이었다면,
지금 우리 팔목의 스마트 워치는 오히려 나의 내면과
건강을 성실히 보살피는 따뜻한 조력자에 가깝다.
"오늘 이만큼이나 수고했어"라고 말해주는 심박수 그래프를 보고 있으면,
기계가 건네는 뜻밖의 위로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친구들과의 경쟁을 조장하기도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와 팔목의 시계를 풀어두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종류의 평온을 마주한다.
시계를 차고 있는 동안 내가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려 노력하는 '성실한 직장인'이었다면,
시계를 벗어둔 지금은 오직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자유인'이 된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란 ‘운동의 수(數)’라고 정의했다.
즉, 내가 진심으로 몰입하고 즐거워하는 순간에만
시간은 비로소 생동감 있게 흐른다는 뜻이다.
팔목에서 시계를 떼어내는 행위는 결코 도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하루 세상을 향해 정직하게 내디뎠던 발걸음을 정리하고,
내일 다시 힘차게 나아가기 위한 나를 충전하는 방식이다.
손목시계를 풀어 버리면, 시계를 차고 있던 팔목의 자리가 시원하면서도 따스하다
그렇게 책상 위에 놓여진 내 손목시계는 이제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은은한 빛으로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든든한 친구와 같아 보인다.
세상의 시계는 계속해서 돌아간다.
하지만 세상의 시계에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
내가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이 순간이, 나의 시간이 된다.
한때는 욕망의 대상이자 세상을 쫓게 만들던 시계는
역설적이게도, 이제 내가 세상의 시계에서 벗어나
작은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