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였었는데 지금은
일기는 나에게 항상 숙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생 시절, 여름 방학에 하는 가장 큰 숙제가 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기라는 숙제는 매일을 기록하는 것이 이 숙제의 본질이겠지만,
나는 늘 밀려서 썼다.
2주 전 화요일의 날씨가 어땠는지 지어내느라 머리를 쥐어짜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런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면, 더 이상 일기는 숙제 목록에서 사라진다.
약간의 해방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거기에 나는 더 이상 일기를 강요받는 어린이가 아니라는 감각까지 더불어,
스스로 일상을 통제할 만큼 성장했다는 묘한 자신감까지 준다.
그래서 내가 다시 일기를 쓴다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나의 행동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있고,
그에 따른 모든 책임까지 지는 것이기에,
내가 기록이라는 행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전까지, 나는 일기를 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잊혀진 내 과거의 기억들은 내가 가져가야 할 책임이다.
사회가 부여한 수많은 '해야 할 일(To-do)' 리스트를 처리하느라 바쁜 삶에서,
스스로 숙제를 추가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바쁜 순간, 나는 다시 백지 앞에 섰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그의 저서 《수상록》을 쓰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을 쓰노라(Je me peins)."
그에게 기록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기 내면의 풍경을 붙잡아두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어린 시절의 일기가 선생님께 검사받기 위한 '전시용 기록'이었다면,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를 '자기 돌봄의 기술'이라 불렀다.
외부의 시선과 사회적 요구가 나를 규정하려 할 때,
스스로를 기록함으로써 나만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행위로 말이다.
낮 동안 사회의 언어들을 처리하느라 지친 심신을,
나만의 언어와 기억으로 다시 이어 붙이는 과정이다.
지금 내 책상 위의 일기장은 오직 나만을 위한 풍경화이다.
이제 나는 날씨를 지어내지 않는다.
대신 오늘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순간이, 어떤 사소한 문장이 내 심박수를 높였는지 정직하게 적어 내려간다.
모나미 펜 끝에서 볼펜똥이 쌓이는 만큼 내가 나를 이해함이 쌓여간다.
키보드의 커서처럼 깜빡거리며 재촉하지 않고,
종이는 그저 묵묵히 내 사유가 스며들기를 기다려준다.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던 시절이 '성장'인 줄 알았으나,
진짜 성장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숙제를 스스로에게 내어주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사회가 판단하는 이상적인 궤도를 이탈해 나만의 궤적을 그리겠다는 결단과
그리고 그 결단의 발자취를 내일의 나에게 어제의 내가 전달하는 방법으로서, 나는 매일 밤 일기장을 펼친다.
나만의 일기 마침표는 ‘끗‘이다.
일부러 틀린 맞춤법으로 오늘 하루의 마침표를 찍는다.
사이시옷은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서 합성명사를 만들 때 사용한다.
코 + 등 = 콧등이듯이, 다른 곳에는 기록되지 않을,
오직 종이와 볼펜만으로 기록하는 나의 하루는
내일도 이어지기 때문에 ’끝’이 아니라 ‘끗‘이다.
오늘도 감사한 하루가 끗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