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규모, 도메인, 기술
회사를 선택하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는가?
이게 참 어렵다. 경험을 해봤어야 알지. 다년간의 경력을 쌓았더라도 경험해 본 회사는 2~3개 수준일 테니까. 이 글의 서두부터 밝히기 부끄럽지만 나도 그렇게 많이 안 다녀봐서 잘 모른다. 다만 내가 깊이 해본 고민에 대한 해답은 나눠줄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준들에는 우선순위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연봉 하나만 보고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기준을 복합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 기준들 간에 가중치도 천차만별이다. 이런 기준들이 있다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된다.
사실 세 번째 기준 말고는 비 엔지니어의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특히 회사가 R&D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문화를 중시하기 때문에 들어간 부분이다.
피터 틸의 명저, [Zero to One]에서는 스타트업의 성장 라운드를 정의하는데 Zero to One이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그리고 이는 여러 해석을 거쳐 One to Ten, Ten To Hundred의 개념으로 한 뎁스 더 발전했다. 아래의 설명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내 자의적인 해석도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스타트업의 성장 단계를 아래 3가지 분류로 나눠봤다. 읽어보고 고민해 보자.
- 나는 어디가 어울리지?
-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단계는 어딜까?
- 지금 성장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1. 0 to 1
어떤 비즈니스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는 회사다. 없던 개념이나 비즈니스를 창조해 내는 조직이다 보니 빠르게 MVP를 만들어 시장의 평가를 받거나 반응을 살펴야 하는 단계다. 비즈니스 모델이 정립되거나 자금난으로 망할 때까지 이 구간이 반복될 것이다.
회사로서의 구색을 갖추는 것보다 우리가 고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업무환경이나 시스템이 마치 창업 동아리처럼 조악할 수 있다. 내 일이 아니어도 회사가 발전하는 방향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시스템에 가깝다. 이는 보통 선호되지 않는 업무환경에 가깝다.
다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개개인에게 과분한 엄청난 책임과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다. 시스템도 따로 없기 때문에 제약도 별로 없다. 불도저처럼 업무를 처리해 나갈 수도 있다.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도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귀찮게 누구의 승인을 받고, 일을 받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못하는 답답한 환경이 아니다.
이런 부분에 강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동기부여가 생길 수 있다. 사용하고 싶은 기술이나 툴을 써가면서 스마트하고 트렌디하게 일할 수 있다.
물론 보상의 경우는 안정적이지 않다. 당장 몇 달을 더 일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고 복지라고 부를 만한 것들도 부족하다. 즉, 회사의 밝은 미래에 베팅을 해야 한다. 스타트업에 초기 합류한 인재들은 스톡옵션을 행사하고 저렴한 값에 자사주를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높은 보상을 기대할 수 있다.
2. 1 to 10
나는 이 단계를 돈 버는 단계라고 부른다. 혹자의 설명에서는 회사로서의 시스템을 갖춰가는 단계라고 한다. MVP검증을 통해 회사가 어떤 식으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했으니, 이제 비로소 회사로서의 구색을 갖출 적당한 시기인 것이다.
아래 설명은 링크드인의 어떤 글에서 발췌해 번역한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고객 기반을 확장하고 신규 고객을 유치하여 비즈니스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주요 초점 중 하나입니다. 규모를 확장하려면 초기 유기적 성장을 넘어 고객 확보 채널을 다양화하고 확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디지털 마케팅, 콘텐츠 제작, 파트너십 및 타깃 고객층에 맞는 기타 전략을 모색해야 합니다. 다양한 채널을 테스트하고 결과를 측정한 후 투자 수익률이 가장 높은 채널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실험이 중요합니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워크플로우를 간소화하고, 생산성을 향상하는 도구와 시스템에 투자하고, 개선이 필요한 영역을 파악하는 등 비즈니스 운영을 최적화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효율적인 운영은 높은 수준의 품질과 고객 만족도를 유지하면서 리소스를 보다 효과적으로 할당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시기의 회사는 일단 분위기가 제일 좋은 것 같다. '이게 될까..?' 하는 불확실성도 지나갔고, 눈앞에 희망찬 미래가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몸은 좀 힘들어도 일할 맛이 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게 될까..?'가 지나갔어도 '이게 끝까지 갈까..?'가 해결된 건 아니기 때문에 불확실성과 자금조달의 어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연봉이나 복지도 아직 높은 수준으로 지급하기 힘들다.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긴 힘들지만, 스타트업 투자 라운드로 치면 Series B, C. 누적 투자금액 2~300억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이고, 투자 안 받아도 훌륭하게 매출 내거나 MAU 같은 지표를 미친 듯이 뽑아내는 곳도 많다. 그냥 기준 중 하나로 생각해 두자.
3. 10 to 100
스타트업의 마지막 단계이자 또 다른 사업의 시작이라고도 보는 이 단계는 보통 유니콘이나 데카콘으로 불리거나 Exit 이후 과정 통틀어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검증받은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돈을 버는지도 잘 알고 있으며 안정성 있게 매출을 내온 기업이 이 기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겠다. 대기업, 중견기업이라고 칭하는 기업들도 속한다. 뭐 사원 수나 매출, 필수 복지 여부 등을 가지고 나누기도 하던데 그만큼 10 to 100을 하는 회사들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곳들은 망할 확률이 거의 없다. 이미 시장에서 점유율을 꽤 높인 상태고 수직적 확장은 할 만큼 한 기업일 확률이 높다. 보통 수평적 확장을 하거나 현재 가진 점유율을 지키는 형태로 기업이 운영된다.
연봉이 높고 복지도 빵빵하다. 근무환경도 좋다. 하지만 공격적으로 일을 하기엔 제약조건이 많고, 뭐 하나 잘못했을 때의 파급효과가 큰 편이다. 엔지니어로서는 옛날 기술을 꾸역꾸역 쓰면서 버텨야 하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 기술 도입은 꿈도 꾸기 힘들다. 하지만 반대로 대규모 기술팀에서 제품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울 수는 있다.
나는 이 섹션을 한마디로 덕업일치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싶다. 일을 더 재밌게 해주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돈이나 복지도 있고 회사 분위기나 좋은 동료들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내가 기여하고 있는 프로덕트에 대한 애정이다.
당신은 어떤 도메인에 관심이 있는가? 예를 들어 패션, 의료, 반려동물, 금융, 재테크 등의 대표적인 분류가 있다.
내 예시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나는 외모 꾸미는 걸 좋아한다. 자주 활용하는 서비스는 무신사나 29cm 같은 의류 및 라이프스타일 판매 서비스나 의류 콘텐츠를 발행하는 회사들이 운영하는 서비스다. 정보도 얻고, 공유하고 구매하는 사이클에 크게 공감하고 나도 그 일원이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션 쪽 커머스 회사에 가고 싶다. 내가 정말 자주 쓰는 서비스 회사면 더 좋겠다. 그 회사들이 풀고 싶어 하는 문제에 나도 관심이 많으며 보통 그렇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기에, 시너지가 난다.
내가 관심 없는 분야의 프로덕트를 사랑하기는 힘들다. 반려동물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펫 커머스 프로덕트에 애정을 붙일 수 있겠는가. 내 능력의 110%, 120%의 시너지를 내는데 분명히 도메인과 프로덕트에 대한 애정이 포함된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내 경험상 정말 엄청난 시너지를 견인한다.
적어도 내가 사용해 봤을 때 흥미로운 서비스를 택하자. 그들이 푸는 문제에 깊게는 아니어도 공감해 보자. 만약 아무리 사용해 봐도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그 서비스를 만드는데 적어도 즐겁게는 만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발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듯, 특정 개발의 영역에서도 그 회사의 핵심 기술을 기반으로 카테고라이징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직군인 웹 프런트엔드 개발로 설명을 열어보자.
어떤 웹 서비스를 하는 회사가 있다. 여기에 가면 웹 프런트엔드 개발 하나는 잘 배우고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근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조금 더 깊은 개념이다. 즉, 웹 프런트엔드 개발 하나는 잘 배우고 나오겠구나는 당연한 거고, 어떤 특색 있는 영역의 기술을 더 배울 수 있는가를 말한다.
내가 이 회사에 가면 이런 기술을 배울 수 있겠구나 같은 것 말이다.
- 이미지 처리 하나는 확실히 배울 수 있겠다.
- 화려한 3D 애니메이션을 경험할 수 있겠다.
- 실시간 영상 재생이나 비디오를 다룰 수 있겠다.
만약 내가 코인 거래소에서 웹 프런트엔드 개발을 한다고 해보자. 실시간 데이터 처리가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다. 언뜻 생각해 봐도 초, 틱 마다 엄청난 데이터를 받아서 준 실시간으로 리렌더링을 해야 한다. 실제로 바이낸스나 업비트 같은 리액트 기반 웹 거래소 서비스를 켜고 리액트 리렌더링 감시를 해보면 매우 잦은 빈도로 리렌더링이 일어난다.
또한 차트를 그릴 땐 다른 웹서비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canvas라는 태그를 사용한다. 캔버스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은데, 이곳에서 업무 경험을 쌓는 것만으로도 canvas API를 깊은 수준까지 경험할 수 있다.
또 어떤 게 있을까? 조금은 흔할 수 있는 커머스 기업에 몸을 담는다면 웹 성능 최적화나 이미지, 폰트와 같은 부분에서 사용자 경험을 신경 써볼 수 있다. 루닛이라는 의료 AI 기업의 프런트엔드 개발자는 수십억 개의 세포나 조직을 분석하는 역할이라 초고화질 사진 데이터를 처리한다고 들었다. Web3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조직에서는 기존 Web2에서와는 다른 규칙으로 웹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지만, 우리는 엔지니어인 만큼 기술에 어느 정도 집착할 필요는 있다. 어떤 회사에서 일반적인 웹/앱 서비스가 아닌 특정 기술에 날카로운 서비스를 만든다면 기술적으로도 크게 성장할 수 있고 개발자로서 흥미도 느낄 수 있다.
- 나는 0 to 1 단계에 있는 금융 도메인에 가서 자유롭게 일할 거고 대규모 데이터 처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선택할래.
- 나는 10 to 100 단계에 있는 교육 도메인에 가서 좋은 복지를 누리면서 일할 거고, 동영상 재생이나 보안 기술 같은 걸 배울 거야.
- 나는 1 to 10 단계에 있는 배달이나 음식 관련 도메인에 가서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경험을 쌓을 거야. 한 번에 많은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을 배워볼래
현실적으로 스타트업 혹한기라거나 당장 다음 달 카드값이 걱정이라면 이런 조건 따지지 못하고 조건에 맞는 곳을 빠르게 찾아갈 것이다. 즉, 어디까지나 내가 이 세 가지 기준을 결정할 수 있을 때 오래 행복하게 다닐 수 있는 회사를 찾는다면 이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조건이 붙는다.
나도 이번 이직 페이즈가 길어지고 멘토링을 하며 멘티분들에게 회사 고르는 법에 대한 조언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고민하게 되었다. 최대한 잘 정리해서 글로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