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집을 정돈하고 적응하는 가운데 봄이 성큼 다가온지도 모른 채 바쁜 하루가 이어졌다.
마당 옆 텃밭에는 어느새 초록 풀들이 겨울 언 땅을 녹이고 쑤욱 기재를 켜고 있었다.
"엄마, 벌써 꽃이 폈어요!" 텃밭에 빼꼼히 얼굴을 내민 잡초 풀의 꽃을 보고 딸아이가 말한다.
"꽃인 줄 알았구나. 이곳은 따뜻한 남쪽이어서 다른곳보다 빨리 풀들이 많이 자라난 거야."
딸아이는 매일 마당 옆 텃밭의 풀과 꽃을 관찰하며 텃밭의 흙을 밟아본다. 흙 감촉이 부드럽고 좋은지
매일 뛰어다닌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 문득 바라본 창가로 텃밭에서 뛰노는 딸아이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포근하고 흐뭇해진다.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3월 초입, 텃밭을 가꾸어야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짐작케 했다.
가족들이 한데 모여 텃밭에 어떤 작물을 심어볼까 고민해보았다.
"엄마 방울토마토, 상추, 딸기, 당근을 심어보고 싶어요."
딸아이 말을 수렴하여 지인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묘목농장을 찾았다.
농장주인께서 아직은 3월 초라 상추 모종만 구입할 수 있다고 하셔서 아쉬운 대로 거름과 상추 모종만 구입하여 집으로 향했다.
휴일 아침, 온 가족이 텃밭 가꾸기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먼저 전에 사시던 분이 가꾸었던 텃밭의 흔적인 묵은 비닐을 걷어내는 작업부터 출발했다. 비닐을 제거하고 흙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 초록 잡풀을 호미로 뽑아냈다. 꽤 넓은 텃밭에 자란 잡초들을 뽑아보니 어느새 두둑한 풀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다음 작업은 흙을 고르는 일이었다. 다양한 농기구(호미, 괭이, 삽, 쇠스랑)를 이용하여 흙을 파고 퇴비를 뿌리고 골고루 섞어 주었다. 이랑(두둑+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덮고 호미로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모종을 심었다.
텃밭을 일구는 가운데 만난 흙내음은 참으로 반가웠다. 향긋하기까지 했다.
얼마 만에 조우한 흙내음인가? 흙이 주는 특유의 정겹고 포근한 내음에 어린 시절로 추억여행을 잠시 떠나보았다. 30년 만에 다시 마주한 흙내음은 어린 시절 기억 상자 속의 소중한 추억을 맘껏 꺼내 주었다.
13살까지 지냈던 나의 고향, 깊은 두메산골 매일 나의 놀이터가 되어주고 놀잇감이 되어주곤 했던 것은 흙더미이다.
옆집 언니들과 흙을 산처럼 쌓아 나뭇가지 깃발을 꽂아놓고 누가 많이 흙을 가지고 가나 내기를 겨루었다.
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흙들은 친구들과 함께 하던 소꿉놀이의 주요 소품이었다. 고운 흙은 밥이 되고, 흙을 주물럭 해서 동그랗게 만들면 맛난 반찬이 되어 주었다. 겨울에 거친 흙을 매일 가지고 놀던 손은 어느새 갈라지거나 터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발라주시던 로션은 세상 어느 감촉보다 보드라운 따뜻한 약이 되어주었다.
시골 앞마당 텃밭은 늘 우리 식탁을 책임져 주었다. 매일 아침 신선한 채소들로 가득 채워졌다.
어린 시절 친정엄마는 4자매중 늘 내 이름을 부르시곤 텃밭의 열매를 따오게 하셨다.
"선아야, 텃밭에 가서 부추 좀 잘라와!"
"오이와 호박 좀 따오렴"
"초록 고추 5개만 따다 줘"
"당근 하나 쏙 뽑아오렴."
텃밭의 열매를 따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다른 심부름은 다 귀찮아도 이 텃발열매 따가지고 오는 것만큼은 결코 싫지 않았다. 텃밭 열매를 따러 갈 때마다 당근과 내가 심은 수박 씨앗의 열매의 싹이 자라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큰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열매는 크게 맺히진 않았지만 흙을 뚫고 나와 귀여운 싹이 솟아나고 잎이 되고 열매가 맺히기까지의 과정은 경이롭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