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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May 16. 2021

늙은 가족, 처분합니다.

비오는 밤, 전기스탠드의 따듯한 불빛이 발하고 있는 방 안.

곧 불이 꺼지고 방안을 비추던 전기스탠드는 주인에 의해 차가운 거리 한편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다.  

내동댕이쳐져 비를 맞고 있는 오래된 스탠드는 아늑한 방에서 자기 자리를 대신해 주인과 함께 있는 새 스탠드를 서글프게 바라보고 있다. 행복했던 예전의 자기 모습을 회상하듯. 카메라는 그 스탠드를 마치 길가에 내버려져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 모습처럼 의인화해서 보여준다. 버림받은 낡은 전기스탠드의 처량한 신세를 극대화 시켜서. 이윽고 비를 흠뻑 맞고 있는 한 남자가 화면 속으로 들어와 던지는 한마디,


“사람들은 오랫동안 쓰던 램프를 버릴 때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지.

미친 거 아님? 램프는 감정이 없다고!! 그리고 새것이 훨씬 좋아.“

이 이야기는 모 가구회사의 광고 내용이다. 전하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영혼 없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쓸데없는 애착을 꼬집는다. 무엇이든지 신상품이 최고니 오래된 물건들은 새 것으로 바꾸라는 얘기다.

내게도 많은 세월을 같이한 애장품이 있다. 비록 생명 없는 물건이라고 하지만 오래 함께했고, 제 역할을 잘 수행해 온 가족같이 정든 물건이다. 당장 버린다면 새삼 아쉬워하며 그리워할 것들이다.


늙은 차를 버렸다.

흔히 얘기하는 애마(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내가 애마 남편이 된 느낌이다)를 도살장으로 보냈다. 녀석은 갈수록 힘이 부쳐갔다. 네식구가 좌석을 채우는 날에는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헐떡거렸다. 가래라도 낀 것 처럼 쉰소리가 점점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에 다다르고 말았다. 결국 만장일치의 가족 판결이 선고됐다.

폐차, 땅땅땅!

막상 보내려고 하니 편치 않은 탓 녀석의 처음이 생각났다.

차를 샀던 첫 날, 온 국민이 축구의 마력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새 차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어머니는 무사 안녕을 빈다며 차바퀴에 떡을 뿌리시고 막걸리를 부우셨다. 당시 내가 아직 종교적 믿음을 갖기 전이라 그저 어머니의 이 의식을 같은 바람으로 지켜보았다.

차는 식구들보다 내 본능을 오롯이 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육두문자가 서슴없이 튀어 나오거나 핸들ㅡ왜 사람들은 화가 나면 죄 없는 핸들만 쳐대는 걸까ㅡ로 분을 삭하기도 했다. 혼자 생각하다 실없는 웃음을 날리기도 했고 울음을 말리던 곳도 차 안이었다. 흘린 감정을 받아주던 질그릇 역할을 해 준 차였다. 주인의 역사를 그렇게 지켜봐 온 산 증인이었다.  

평소 부족한 두 아들과의 대화도 차 안에서는 깊어졌다. 가끔 동행할 일이 있을 때면 자연스레 부자간은 말로 엮어진다. 아마도 평소 데면데면한 관계가 한정된 공간에서도 이어지는 것을 대화로 막을 수밖에 없었던 탓도 있었으리라. 1박 2일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철이 바뀔 때마다 다녔던 아내와의 여행에도 늘 동행했다. 차는 가족들간의 많은 사연을 실어 날랐다. 가족들이 커갈 때 마다 차는 점점 작아져 갔다.

그렇게 거의 20년을 견뎌준 차를 환갑잔치 아니 칠순, 팔순의 축하는 해 주지 못 할망정 폐기처분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허전해질 수밖에 없다.


폐차시키기 전날 퇴근 후 집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차 생각에 발길을 주차장으로 돌렸다. 한동안 차 주위를 서성이다 닳고 닳은 상처투성이 이곳저곳을 아이를 보듬듯 만져본다.

‘많이 아팠지.’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툭 튀어나온다.

순간 내 귓가를 울리는 저 광고 속 대사.

(사람들은 오랫동안 쓰던 램프를 버릴 때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지.)

‘미안하다. 고생 많았다!’

(미친 거 아님? 이 차는 감정이 없다고!)

번쩍 정신이 든다.

‘그래 맞아! 쓸데없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남들이 보면 정신 나간 놈으로 보이겠네.

오래 있으면 CCTV로 보고 있을 경비아저씨가 내 이상한 행동을 보고 쫓아오지 않을까 싶어 성급히 자리를 벗어난다. 주차장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자 내 차가 움직이는 것 같은 환영을 본다.

'그리울거야.'

(그리고 새것이 훨씬 좋다고!)

그 새 또 나간 정신을 추스르며 서둘러 집으로 들어간다.


모든 문명의 이기 중에서 자동차만큼 대우받기계도 없을 듯하다. 가족이라는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유일한 무생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우도 남다르다. 아플 것을 대비해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자동차검사)을 해주고, 큰 병(교통사고)을 염려해 생명보험 (자동차보험)도 들어쥤다. 식비(연료비)와 품위유지비(세차,광택)도 대준다. 이 정도면 거의 한 인격체으로서의 대우다. 운명을 같이 할지도 모를 동지인 만큼 그야말로 알아서 잘 모셔야 한다. 아는 지인은 차에다 아예 이름까지 지어 줬단다.


예전에 자기 차와 결혼한 한 여성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운전자와 교감할 수 있는 ‘감성 엔진’에 대한 기사도 나왔다. 자율주행을 넘어서 어렸을 때 TV에서 보았던 “달려라 키트”를 실제로 타고 다닐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 싶다. 차와 대화를 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맞선 보듯 어색하겠지만 곧 익숙해지고 오랜 기간 동안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되면서 어느 날 이 문명의 이기는 운명적 이성(利性)이 돼 있을 것이라는 미친 상상을 해본다. 그렇게 되면 아마 차를 쉽게 폐차시키지도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를 버리려는 주인의 심중을 미리 알고 스스로 도망가거나 대들지도 모를 일이니.

 

 영화 <크래쉬>는 자동차에 성적 매력을 느끼게 돼버려 차와 연애(?)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섬뜩하면서도 기이한 일이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는 세상이 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아무래도 내가 영화를 너무 본 탓에 생긴 인지 왜곡 내지는 편도체 이상이 가져온 망상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한편으로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도 아닌 듯하다. 영화 속 상상력은 시간 문제일 뿐 늘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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