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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Jul 11. 2021

흐트러진 침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아주 오래전,

십 대 어느 시절 <흐트러진 침대>라는 아주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는 제목의 책에 이끌려 밤잠을 설쳐가며 읽은 기억이 있다. 질풍노도와 같은 주체할 수 없는 혈기를 당시 한참 유행하던 빨간책이라는 조잡한 성인물로 해소하곤 했던 터라 같은 기대감으로 눈에 불을 켜고 탐독을 했지만, 그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분명 흐트러진 침대라는 제목에 걸맞은 ‘쌔끈한’ 그런 장면이 분명 나와야 했다. 격렬한 사랑을 나눈 남녀가 흐트러진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글로 살아나 내 눈앞에서 꿈틀거려야 했는데... 책장은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지만, 등장인물들은 밀당만 하다 끝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책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던 터라 인내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결국 읽기를 포기하면서 책 <흐트러진 침대>는 내 흐트러진 이불 위로 무참하게 내던졌다.

지금의 희미한 기억으론 그런 장면이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청소년 관람가를 위해 모텔에 들어가는 남녀와 그 후 나오는 장면만 보여주는 애정영화처럼 앞뒤만 남고 과정(?)은 생략되거나 밋밋한 묘사로 나를 실망하게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흐트러진 침대>는 계속 내 머릿속에서 채워지지 않은 관음적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훗날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명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인 프랑수아즈 사강이 이 책의 저자라는 것과 그녀의 작품들이 세계문학전집 속에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대해야 할 작품을 나는 19금의 망상으로 읽고 있었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질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갤러리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흐트러진 침대ㅡ제목은 아니다ㅡ를 보게 된 건 성장기를 한참 지난 후이다. 현대인 삶의 단면을 무심하고 무표정한 방식으로 포착함으로써 인간 내면에 깃들어 있는 고독과 상실함, 단절을 표현한.... 어쩌고저쩌고하는 작가론이나 작품 평 보다 오직 내 관심사는 저 침대였다. 그림을 대하자마자 몇십 년 전 기억을 동원해 그 은밀한 공간을 다시 불러냈다. “근데 왜 저러고 서있는 거지? 남자는 어딨어? 화장실에 갔나? 남자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떠난 남자를 생각하는 걸까? 정사 전일까 후일까? 그것도 아니면 옷 벗고 멍 때리는 여자?” 결국 그림 앞에서도 나는 예술적 감성이 아닌 호모섹시언즈적 감각을 안테나처럼 세우고 바라보고 있었다.


모 신문에서 문화심리학자이자 자칭 화가인 김정운이 쓴 “배에서 해 봤어요?”라는 아주 자극적이면서 그 옛날 십 대의 저질스러운 시절로 회귀하게 만든 제목의 칼럼을 읽었다. 본문을 읽기 전 제목부터 후끈 달아오른 머리로 난 다시 원초적 상상력을 쏟아내며 흥분한다. 우리나라 최고언론에서 이런 따위 글을 싣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했고 이건 충격을 넘어선 전복이라고 발끈했다. 그러면서도 수십 년 전 10대 때 파릇하고 싱싱한 혈기 왕성함은 50대 말기 중년의 변태적 호기심으로 탈바꿈하여 순식간에 본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대감. 뭘?

내용인즉, 지인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얘기를 듣고 필자가 그 지인에게 물었다.

‘배에서 해(=태양) 봤어요?’

그러자 내 상상력을 답습하거나 같은 일차원적 부류였을 그 지인 대답이 걸작이다.

“아니, 아직 못해 봤어. 근데... 많이 달라?”

한국어의 다중적 의미와 띄어쓰기가 사람을 아주 저급한 수준으로 만들었다.


십 대 때의 언어적 상상력은 50대를 넘어서도 전혀 퇴색되지 않고 여전히 원초적이며 미성숙 상태에 머물러 있다. 어릴 적 장난감으로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걸 대견하게 보고 있는 부모에게 커서 훌륭한 건축가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했지만, 커서도 여전히 장난감만 가지고 노는 한심한 어른이 되고만, 지적 성장이 정체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나이가 들수록 샘솟는 저질스러운 호기심은 교양이나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단세포적 감각의 유혹에 쉽게 반응한다. 그 수준 낮은 엿보기는 한술 더해져 이상의 날개를 달고 19세 관람 불가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지천명 나이도 말년인데... 이게 하늘 뜻인가 보다. 하늘의 명을 알 나이니 너희들 맘대로 하라는. 그러니 나이가 맞게 살라는 거, 나잇값 좀 하라는 얘긴 중년 남성들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가 아닐까?


지나가는 아가씨를

힐긋힐긋 쳐다본다고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마라

그것이 남자다.

                   - 이채.  <중년의 고백>중 -


그건 그렇고 에드워드 호퍼의 저 그림 제목은 '햇빛 속의 여인(A Woman in the Sun)'이다. ‘흐트러진 침대’, ‘배에서 해 봤어요?’ 그리고 ‘햇빛 속의 여인“......???? 순간 이 중년 꼰대의 언어적 호기심은 다시 꿈틀거리고 그림은 이런 제목으로 재탄생한다.

“저 여인은 흐트러진 얼마나 오래동안 침대에서 해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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