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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Sep 12. 2021

추석 유감

민소매에 드러난 팔뚝에 아침, 저녁의 서늘한 기운이 들어 닭살이 돋아나는 걸 보고 한 해가 꺾여가는 시간으로 가고 있음을 느낀다. 얼마 전까지도 빈정거리던 더위를 그렇게 탓하고 있었는데... 참 간사한 마음이다. 봄물이 여름으로 흐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가을이 목전이라니. 여전히 낮 볕은 따갑지만 이미 사양길이라 더 이상 힘자랑은 글렀다. 가을장마라는 반갑지 않은 날씨 탓에 이즈음의 푸른 하늘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역시 자연은 정직하다. 대지의 밀도 높은 제철 향이 점차 코끝으로 올라오고 있다. 빠끔히 머리를 내민 가을 초입에서 여름의 격렬한 무질서에 허하고 소진되어, 바람 빠진 풍선 모양 흐느적거리는 몸뚱이를 추슬러야 할 때다. 비록 날씨가 가탈스럽기 일쑤여서 온전한 계절의 교대가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자연의 자정과 계절의 순환이 사람 일이 아님을 다행스러워한다.

     

올해는 가을보다 추석이 먼저 당도하는 듯싶다. 아니 추석이 가을을 데려올 모양이다. 예년보다 이른 탓에 늦장마까지 겹쳐서인지 시장에 깔린 가을걷이의 빛깔도 그리 곱지 못하다. 아마도 대목을 앞둔 주인의 바쁜 손길에 이끌려 여물지 못하고 나와 앉았기 때문이니라. 그래도 명절이라 새색시 단정하고 나온 듯 과실, 채소들의 표정이 실하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보기가 좋다.      


같은 명절이라도 년 초 엄동설한의 한 가운데 훅 치고 들어오는 설날과 랭보의 시 제목 <지옥에서 보낸 한 철>처럼 여름 내내 폭양에 시달린 탓에 서늘한 기운과 함께 찾아오는 추석을 맞이하는 기분이 사뭇 다르다.

어린 시절 설날은 한 해의 시작이라는 상징성이 부여하는 엄숙함으로 예와 규범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복을 입어 몸을 단정히 추슬러야 했고, 장유유서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의식(세배)을 치렀다. 질리도록 반복되는 어른들의 덕담이라는 금언의 가치는 세뱃돈이라는 금전의 가치에 밀려 바로 잊어버린다. 해야 할 놀이조차 정해져 있었다. 윷놀이, 제기차기, 연날리기..

음식 장만은 또 어떠했는가. 요즘처럼 인스탄트 저장식품이 다양하게 있는 때도 아니고 겨우살이 중 내야 하는 것이라 넉넉하지 않은 식재료로 차례상을 꾸려야 했다. 그만큼 먹거리에는 한정돼 있어서 눈처럼 쌓인 흰 떡국만 연신 뱃속에 부어 넣어야 했는데 다행히 나는 떡국을 무지 좋아해 물리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설날은 빈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은 날이었다.

    

추석은 분주했다. 우리 집이 시장인지 시장이 우리 집인지 헷갈릴 정도로 친인척들로 북적거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술 심부름 정도였다. 어차피 설날도 아니라서 용돈 수금(?)에 한계가 있는 지라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싶어 비슷한 처지의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떡, 전, 과일 등 추석의 넉넉함을 한 봉지씩 배낭 삼아 짊어지고 동네 산에 오르곤 했다. 푸른색이 모자람이 없는 하늘과 만록의 끝은 추석이 왜 가을에 있어야만 하는지를 눈이 시리도록 알려주었다. 오래 기다린 누군가를 이제 막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바뀌는 계절의 문턱에 서서 곧 사라지고 지워질 소멸의 시간 앞에 차려진 풍요에 부여된 의미를 세심하게 읽고 기억해야 하는 날이었다. 설날이 한 해의 계획을 흔들림없이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적으로 맞이하는 명절이라면 추석은 맞부딪치는 계절과 계절이 내는 향으로 잠시 호흡하며 사색할 수 있는 감성이 맞이하는 명절이 아닌가 싶다.  


그런 추석을 올해도 기분 내기조차 힘들어졌다. 생활 자체의 패턴이 바뀌고 대면하는 일조차 어려워진 마당에 무슨 분위기며 만남의 자리를 만들 것인가. 부모님이 해외에 계시기에 애당초 아내(며느리)에게 명절증후군이란 남들 얘긴 듯싶을 수 있고, 작년에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역시 처가에 신경 쓸 일이 크게 없으니 이 힘든 시기에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지만 부모님을 뵌 지가 언제인지 열 손가락도 모자라는데다 팔순을 넘긴지 한참이 지니다보니 하루하루의 안부에 촉각이 곤두서곤 한다.

   

“너 혼자 남았는데 어쩌니 아범아! 너도 이리로 오너라.”

작년 봄 사형제 중 막내인 남동생이 마지막으로 이민을 떠나버리자 어머니는 혼자 남은 나를 안쓰러워하셨다.

“저마저 여길 떠나면 이 나라는 누가 지키라구요?”

나의 실없는 농담에 어머니의 마지못한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 슬프게 전해왔다.

여전히 두 다리로 어디든 다니실 만큼 아직은 물리적 힘에 의지하고 계시나 늘 속이 편치 않으신 어머니, 먼 기억과 어제의 기억 속에서 가끔 혼곤해하시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때면 참 많이 답답해진다. 이런 명절 때라도 며느리가 해드리는 음식 좀 자시게 했으면 하는 바람에 LA갈비를 재고 있는 아내에게 LA 사시는 부모님한테 갈비 좀 보내자고 했더니 싱거운 듯 웃는다.      


부모님을 대신에 남아있는 친족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이 올 추석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두 분이 계실 때와는 다르게 미국으로 떠나신 후 그 거리만큼 친인척들과도 시나브로 멀어진 느낌인데다 예전처럼 직접 대면하고 옛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는 어른들을 잃어가다 보니 대게 교통수단이 아닌 통신수단으로 명절 안부를 대신하고 있다. 그나마 올해는 어려운 상황이 평소의 송구함을 조금은 줄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고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 타협이라는 명분아래 게으름을 나 스스로가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하는 죄스러운 마음이다. 물질적 풍요 속의 정서적 빈곤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자연이 준 풍요도 좋지만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골육지정(骨肉之情)의 풍요만큼 더 기쁜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릴없이 애석한 추석 즈음을 안타까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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