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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Mar 15. 2022

4번 팬티의 미스터리

팬티가 보이지 않았다. 4번이었다. 낭패였다.

하나가 어그러지면 모든 순서가 엉망이 돼버리는데..., 순서는 그냥 정해진 게 아니었다. 나름 기준과 원칙이 있었다. 1번이 가로줄 무늬면 2번은 세로줄 무늬, 3번은 물방울 무늬식의 배열이었다. 그렇더라도 10장 정도 되는 팬티 중 4번째가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매일 갈아입는 속옷이지만 한번 입으면 저녁때까지 벗을 일(?)이 없으니 당연하다. 어쨌든 찾아서 입어야 했다. 지금 입지 않으면 다른 팬티들이 한 바퀴 돌아올 때까지 자기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다시 찾아본다. 옷을 사정없이 뒤적거리는 바람에 서랍은 순식간에 포탄 맞은 전쟁터가 돼버렸다. 아내가 보면 또 한 소리 할 건 뻔하다. 그래도 일단 4번 팬티를 찾는 데만 집중해야 했다.


“내 팬티 못 봤어? 4번 팬티?

결국 보이지 않는 팬티의 행방을 아내에게 묻는다.  


“4번 팬티라니? 그게 뭐야?”

드라마 삼매경에 빠져있던 아내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반문한다.


“아..., 아니 내 팬티들 다 세탁기 돌린 거냐고?”

아차 싶어 얼른 사태를 수습하고 다시 묻는다.


“당신이 빨려고 내놨으면 다 돌렸겠지.”

눈을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내 표정이 뭔가 낌새를 느낀 것 같아 불안하다. 워낙 눈치가 9단인 사람이라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드라마에 집중한다. 남편 팬티 사이즈는 알아도 설마 일련번호가 매겨진 걸 입고 다니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방문을 닫고 다시 서랍을 샅샅이 뒤진다. 혹시나 해서 내가 입고 있는 팬티 번호를 다시 확인한다. 바지를 내리고 태그를 보려 팬티를 열었다. 젠장! 태그가 뒤에 붙어있다. 허리를 돌려 보려 하지만 나온 뱃살 탓에 잘 회전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팬티를 발목까지 내려 확인한다. 역시 3번이었다. 순간 아내가 방문을 활짝 여는 바람에 이 리얼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생중계된다. 볼 거 못 볼 거 없는 부부라지만 아무래도 못 볼 걸 본 것 같은 표정이다. 4번 팬티를 찾는다느니, 속옷을 아무때나 훌러덩 그것도 위가 아닌 아랫도리를 벗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남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이 보였을 듯 싶었다. 아내는 재빨리 문을 닫아버린다. 정지된 화면처럼 서 있던 나는 구시렁거리며 팬티를 올린다.


“당신이 무슨 첩보원이야? 아니면 특수요원이라도 돼? 팬티에 무슨 번호를 매겨서 입고 다니는 거야. 부적을 넣고 다닌 사람은 봤어도, 번호를 써놓고 다니는 사람은 또 처음 봤네. 정말 별일이다.”

며칠 후 아내는 내 팬티를 일렬로 내놓고 어이가 없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남편의 기이한 행동이 수상 쩍었는지 그 특유의 촉으로 결국 밝혀내고 말았다.


“빨리 말 안 할 거야?”

아내의 다그침에 한참을 머뭇거린다. 이유를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난감해한다.  

뜸을 들이며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연출된 원인을 제공한 친구 녀석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깨끗한 팬티를 입고 있어야 하는 거야.”

침을 건더기로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녀석의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들으면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살다 보면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하고 듣다가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녀석의 줄거리를 고속으로 재현하면 이랬다.

길을 가다(혹은 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난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위해 어쩔  없이 옷을 벗겨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 바지를 벗기자 짠하고 팬티가 드러난다. 근데 어째 좀 민망하다. 팬티가 너무 초라하다. 낡아 빠졌다. 오래 입어서 헝겊 쪼가리처럼 너덜너덜하다. 며칠 안 갈아입은 것처럼 색도 바래있다. 구멍도 숭숭 뚫려있다. 하필 그날따라 가장 오래된 거지발싸개 같은 팬티를 입고 나온 것이다.  


“그럼 얼마나 쪽팔리겠냐. 겉옷은 멀쩡히 잘 입었는데 팬티가 걸레라면 얼마나 창피하겠냐고. 자존심에 댄싱이 쫙쫙 가는 거지. 안 그러냐.”

그 당사자가 누구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녀석 말의 요지였다.


“괜히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 나오는 줄 알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거라고.”

궤변인 것 같은데도 쉽게 되받아칠 수 없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유사시를 대비해서 속옷은 늘 청결하게 새것으로 입고 다녀야 한다는 얘기다 이 말이야.”  

사이비 교주의 가르침 같았다.


“그래서 그 말 듣고 팬티에다 번호를 매겼단 말이야. 참 어이가 없네.”

결국 숫자의 비밀을 자백한 남편을 아내는 음식 맛이 없어 대충 씹어 넘기듯 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니, 그러면 그냥 번갈아 입으면 되지 왜 번호는 써놓은 건데?”

아내는 여전히 번호의 의혹은 풀리지 않았는지 심문을 이어갔다.


“내 팬티들 하나하나 상태를 다 알고 있어야 하니까. 어떤 걸 입었는지 헷갈리기도 하고. 입었던 것만 계속 입으면 좀 뭐해서 넘버링을 해서 순서대로 입으려고. 그래야 한 개만 낡아빠질 일 없이 고루고루 상태가 좋지. 편식하면 안 되잖아.“   

아내는 친구 녀석보다 남편의 말이 더 개뼈다귀 같은 소리로 들렸는지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4번 팬티의 실종으로 시작해서 모든 팬티에 새겨진 숫자의 의미, 그 팬티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편과 그런 남편의 정체성을 의심해 결국 그 미스터리를 파헤친 아내의 활약상을 그린 이야기 “4번 팬티의 비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신기한 건 그 사건 이후 아내가 내 속옷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태가 안 좋은 얘들은 알아서 제거해 주고 새 걸로 즉시 보충해 준다. 늘 뽀송뽀송한 팬티들이 준비돼 있다. 아내가 생각을 바꾼 이유는 둘 중 한 가지일 것 같았다. 남편을 선택한 자신을 위로하거나 남편의 머리를 측은해하거나. 아 그 문제의 4번 팬티는 세탁기 옆 구석에 처박혀 있는 채로 한참이 지나 발견됐다. 세탁기에 던져 넣는다는 것이 잘못해서 넘어간 모양이었다. 물론 나와의 동행은 거기까지였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퇴근하면서 문 앞에 놓인 택배 박스를 집어 들고 들어왔다. 아내가 수취인이었다.

“당신 택배 왔는데? 뭐 샀어?”

“응.... 홈쇼핑에서 그냥.... 옷 하나 주문했어.”

아내는 재빨리 내 손에서 물건을 낚아채며 방으로 들어간다.


아내의 서랍장을 살며시 열었다, 순간 내 얼굴은 모호한 표정으로 멈췄다. 거기에는 홈쇼핑에서 샀다는 옷, 아니 정확히는 알록달록한 속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아! 오해일 수도 있다. 아내가 샀다는 옷은 따로 장롱 안에 걸어놨을 수 있을 테니. 아내도 여성이라 특유의 청결함과 깨끗함을 위해 늘 속옷을 정리해 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넣어 둔 것이리라.

다만, 그 팬티들에 넘버링이 됐는지 안됐는지는 차마 확인해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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