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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Oct 20. 2021

엄마들은 왜 가발 피스가 필요한가

1부 딸들은 자라서 엄마가 될까

#대머리독수리여자

#가발가게매출은문제없다


내 나이 19살 무렵 엄마가 처음 집을 나갔다. 처음에는 밤마다 잠깐 어디 가까운 데를 다녀오는 사람처럼 사라졌다 아침이면 다시 돌아왔다. 처음에는 하룻밤, 그다음에는 며칠 밤 있다가 돌아오던 엄마는, 결국 내가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아예 집을 나갔다. 안녕, 잘 지내란 말도 없이. 20살의 나는 그것이 이후로 모녀가 다시는 같은 지붕 아래 밥을 짓고 잠을 잘 수 없는 삶의 시작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엄마가 떠난 집은 사춘기의 끝에 서 있는 딸에게, 그리고 대학 수능을 막 치른 성인이 되지 못한 자식에게, 너무 썰렁하고 마음 붙일 곳이 못 되었다. 친척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해서 엄마의 행방을 찾았다. 엄마가 어디 있는지도, 내가 아는 것 중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던 나는, 날이 선채 오고 가는 어른들의 말속에서 잔뜩 움츠러들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몇 개월이 지났을까. 솔직히 지금은 얼마나 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 나는 세상의 풍파를 직격탄으로 맞으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고 엄마 없이도 잘 지내는 법을 익혔다. 그때 나의 유일한 취미는 계절을 막론하고 문밖의 많은 길을 목적지도 없이 걷는 것이었다. 이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는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러다 우연히라도 엄마가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던가.

그녀 없는 생활에 길들여졌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엄마야" 익숙한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가. 불처럼 화를 냈던가. "어디야? 어딨어?" 무엇보다 빨리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엄마의 실체를 확인해야 했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엄마가 어디서 지내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몸은 괜찮은지. 하나부터 열까지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 엄마는 거리에서 걸어오는 '성큼 자랐을' 나를 보고 눈부시게 웃었다. 그리고 나를 엄마의 새 집에 데려갔다. 부엌과 방이 고작인, 화장실을 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자그마한 공간. 어찌 됐든 집이란 게 다시 생겼으니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방이 마치 그리웠던 엄마의 품인 양 나는 온몸을 붙이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내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달그락거리던 엄마가 밥상을 만들어왔다. 작은 소반 위에 빼곡히 차려진 반찬들. 한 입 베어 무니 이보다 더 좋은 맛이 없다. 엄마는 우걱우걱 숨도 쉬지 않고 먹는 나를 자기는 숟갈도 뜨지 않은 채 바라보기만 한다.


엄마는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어떤 일인지 나는 감히 묻지 못했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그런 불안한 일들만 아니길 바랐다. 그간 엄마는 어떻게 지냈던 걸까.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지런히 밥숟갈을 뜨다, 불현듯 엄마의 머리에 시선이 갔다. 엄마 앞쪽 머리가 어색했다. 빈약한 주변머리에 비해 유난히 풍성했고, 머리칼 색도 차이가 났다. 하지만 호기심은 오래가지 않았고 오래 만난 엄마가 좋아 밥상을 물리고서도, 나란히 오래오래 말도 없이 누워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엄마를 자주 만났다. 그리고 그때 밥상머리에서 내 시선을 끌던 것이 가발 피스인 것을 알게 됐다. 가끔 길을 지나다 가발 집에서 혹은 홈쇼핑에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누군가 착용한 것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엄마가 부분 가발을 하고 있단 걸 알았을 때, 난 엄마가 예뻐 보이고 싶어서, 멋 내고 싶어서 그걸 하는 줄 알았다. 저 나이에도 그런 마음이 있는가 보다 하고 의아해하면서. 당시 엄마의 나이는 50대 중반 즈음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한없이 쇠약하고 시들어버린 모습을 생각하면 꽃처럼 예쁜 나이였다. 가까운 슈퍼를 나가더라도 거울 앞에서 가발 피스를 착용하느라 한참 시간을 보내는 엄마를, 나는 그 후 20년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마흔을 코앞에 두고, 인생의 허리케인을 겪었다. 그리고, 폐허가 된 맘으로 집을 내 발로 나왔다. 섬이고 바다고 도시 지하방이고 내 몸 하나 허락되는 곳이라면 몸을 맡기고 잠들었다. 그리고, 나라를 등지고 바다를 건넜다. 이국 땅에서 홀로 시작한 낯선 생활은, 이전의 상흔을 다 없던 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잠시 눈을 딴 데 돌리게 해 주었다. 이국 땅에 도착한 이후로, 열심히 살았지만, 주변에는 거짓말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천박한 생각을 천박한 줄 모르고 떠벌리는, 인간들이 넘쳐났다.


그렇게 인간관계에 지쳐 있던 중, 한 사람을 알게 되었고 마음까지 주게 되었다. 위태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다가갔다. 누군가에게라도 기대지 않으면, 마음을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던 시절이었다. 막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 위에 발을 내디딘 것처럼, 관계는 첫걸음부터 천리만리 길로 균열이 났다. 상대의 철저한 배신을 알게 된 날, 난 신 앞에 엎드렸다.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내가 어떻게 하면 나도, 누구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즈음이었다. 별안간 머리 앞쪽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방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이 미용실 바닥인 양 많았다. 아직 머리에 남아 있는 머리카락들마저 꼬마 아이의 갓난 머리카락처럼 얇고 힘이 없었다. 열려버린 정신의 맨홀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고 샴푸를 바꾸고 영양제를 먹어도 이미 흐름을 탄 탈모는 멈추지 않았다. 대체 왜 머리 앞부분인가. 제일 잘 보이는 이곳 머리가 빠지는 걸까. 듬성듬성해진, 두피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몰골이 추하고 서러웠다. 이런 모습으로 거리에서 다시 그 사람을 만날까 봐 무서웠다. 나는 문밖을 나서면 어떤 사람도 자세히 보지 않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온 세상이 자동 블러 처리되는 안경이라도 쓴 듯 그렇게 세상을 향한 창을 내렸다.


탈모가 거기서 더 진행되었다면 나 역시 가발 집의 신세를 졌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때 이 대머리 독수리 같은 머리가 새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여자로서 끝장인가. 왜 나는 엄마의 실패를 답습하다 못해 탈모까지 물려받았는가 몸서리를 쳤다. 그러다 엄마는 그때 자신이 얼마나 추해 보이고 싫었을까. 가발 피스에 왜 그리 필사적이었는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왜 그리 어렵고 시간이 걸렸는지 헤아려보게 됐다.


작년 한국에 잠깐 들어갔을 때, 엄마 집에서 막 씻고 나온, 가발 피스를 착용하지 않은 엄마의 민머리를 보게 됐다. 그것은 세월이었다. 세월이 휩쓸고 간 흔적. 엄마가 세상에서 머리가 벗어져라 이 악물고 홀로 버틴 흔적. 이제 같이 산 세월보다 떨어져 산 세월이 길어진, 엄마에게 나는 아직도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엄마를 생각하면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끌려 나온다. 엄마는 모를 테지만, 난 엄마가 죽지 않고 살아줘서, 머리가 벗어지도록 버텨줘서 고맙고 그 강인함이 새삼 놀랍다. 내가 보는 그녀의 탈모는 그녀가 받은 훈장이다. 혹시 나도 이 시기를 넉넉히 이겨내 그 훈장을 받게 된다면, 그렇다면, 역시 기꺼이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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