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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Apr 22. 2024

저 외국인 노동자 할래요, 몽골에서.

내가 몽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로 결심한 이유

한동안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좋아하던 영화도 자주 보지 못했고, 충분히 사색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도 못했다. 해외 파견 한국어 교원으로 일하게 되어서 출국 준비와 현지 적응 일로 분주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집도 구했고, 몽골 생활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어서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느라 여전히 몸은 피곤하고 머리는 복잡하지만, 그래도 글은 쓰고 싶을 때 써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왜 갑자기 몽골의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버렸냐고? 자,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지구촌 시대'라잖아요.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해외 생활을 꿈꿔 왔던 것 같다. 어릴 적 해외살이 경험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대인터넷 시대의 수혜자로써 온갖 해외 문물을 접하며 자란 탓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 시작점이 언제였는지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낯설고 새로운 걸 좋아했고 그런 것들은 대개 한국이라는 울타리 바깥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귀여니를 읽을 때 로알드 달을 읽던 어린이는 나중에 동방신기보다는 올드 팝송을 좋아하는 수상쩍은 입맛의 십 대 소녀가 되었고, 그 소녀는 나중에 '태양의 후예'보다 '랑야방'(2015~2016년에 인기를 끌었던 중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어른으로 자라났으니 말 다했다. 어쩌면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을 거부하는 괴짜 기질(혹자는 이것을 '홍대병'이라고 한다.)이 작용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국어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낯선 언어문화를 접하는 일이 어디 한국어 교사 일 뿐이겠냐마는, 내가 관심 있고 잘하는 것들을 조합해 보니 도출된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나는 외국인을 만나는 것도 좋아했고 국어 공부도 좋아했다. 세계사와 국사는 내가 학창 시절에 가장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니 외국인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내가 가장 잘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일수밖에. 누군가 왜 한국어 교사가 되었느냐고 물으면 나는 자동응답기처럼 이렇게 떠벌리곤 했다.


"외국인도 만나고, 외국 나가 일하고도 싶어서요."
"아니, 무섭지 않으세요?"
"'지구촌 시대'라잖아요. 세상이 마을처럼 작아졌다는데, 한국에서만 살 수야 있나요!"


내게 있어 해외로 나가 산다는 건 대단한 기회였다. 전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내 세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기회! 그런 내가 마침내 해외 파견 교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의 계획대로라면 대학원을 졸업하는 대로 지원할 생각이었지만, 내가 졸업한 2020년은 대 코로나 시대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빗장을 걸어 잠그다 못해 온 지구인이 가택 연금 신세를 면치 못하던 때였다. 해외 취업은 꿈도 꾸기 힘든 시기였다는 이야기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 초보 교사는 수십 장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품에 안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한국어 교사로서 충분히 숙련된 후에 해외로 나가는 거야! 베테랑 교사가 되어 해외로 나가면 완전 근사하겠지? 벌써부터 학생들이 열광하는 소리가 들리는군...'

(미리 말하지만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어리바리한 신입 강사 포지션을 맡고 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던 초보 교사 시절 때보다는 좀 더 능숙해졌고, 성격 좋은 몇몇 학생들이 나를 괜찮게 봐주기는 하지만, 어디 베테랑이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하하...)


세종학당 파견 교원에 지원한 것은 작년 겨울의 일이다.  인류가 바이러스의 등쌀을 이기다 못해 '제로 코로나(Zero Corona)'에서 '위드 코로나(with Corona)로 노선 변경하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 말이다. 나는 한국어 교원으로써 얼마쯤의 경력을 쌓았고  코로나는 더는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2. 그런데, 왜 하필 몽골이에요?


아니, 하고 많은 나라들 중에 왜 몽골이에요?

내가 처음 몽골 세종학당에 지원했노라 선언했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요 몇 년 사이 몽골 관광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긴 했지만 몽골은 아직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사람들이 몽골 하면 연상하는 것은 대개 광활한 초원과 유목민, 말, 게르 따위가 다였으니 말 다했다. 거기 가기로 결심한 나조차도 몽골에 대한 지식이라곤 '모든 몽골인이 눈이 좋거나 말을 잘 타는 것은 아니다' 따위가 다였으니 오죽했겠는가. 몽골이 아니라도 선택지는 많았다. 세종학당 재단은 현지 학당의 요청에 따라 선발할 교원 수를 정하는데, 2023년부터는 지원자가 파견 교원을 요청한 세계 각지의 학당 명단에서 파견처를 직접 고를 수 있게 했다. 그중에는 베트남처럼 한국어교육 수요가 가파르게 상승 중인 나라도 있었고, 미국이나 필리핀처럼 영어가 잘 통하는 나라도 있었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고 해도 어디든 기꺼이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을 테니 다른 곳에 지원했더라도 충분히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몽골을 고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더위를 끔찍하게 많이 탄다. 습하고 더운 여름은 내게 쥐약이나 다름없다. 나는 땀도 엄청 흘린다. 여름이 되면 조금만 걸어도 겨드랑이에 홍수가 난다. 팔 아래가 흥건한 상태로 판서하는 선생을 생각해 보라. 그건 학생들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일뿐더러, 교사 자신에게도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런고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여름이 길고 습하고 더운 나라들을 후보지에서 제외했다. 몽골은 추운 나라라고들 하지만, 뭐 더운 것보다야 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중에 나는 이 이유를 들먹인 것을 조금 후회하게 되는데, 그것은 차차 풀어보도록 하겠다.)


둘째, 나는 빈궁한 독거 청년이다. 위태로운 프리랜서 혹은 계약직 일을 하며 근근이 돈을 모으기는 했지만, 100세 시대(!)를 대비할 만큼 충분히 모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내 집 마련의 꿈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면 한 달 월세가 백만 원이 훌쩍 넘는다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곳에 지원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다.


셋째, 나는 몽골 학생들과 잘 맞았다. 그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학생들이 좋았다. 운 좋게도 내가 만난 몽골 학생들은 대개 성격도 털털하고 성실했고, 나는 그들로 말미암아 몽골이란 나라가 한국과 참 다를 것 같으면서도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배웠다.


넷째, 내가 생각하기에, 몽골은 인구는 적지만 한국에 관심이 많은 나라였다. 한국 교육개발원(KEDI)에서 시행한 '2023년 국내 고등교육기관 내 외국인 유학생 현황' 조사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고등 교육 기관에서 공부한 몽골 유학생 수는 10,375명으로, 이는 중국,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수이다. 울란바타르 거리를 거닐면 한국어 간판을 심심찮게 보게 되고, 길 걷는 행인 10명 중 1명은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울란바타르에만 이마트가 3개 있고, 일반 마트나 식당에 가도 김치는 심심찮게 판다. CU와 카페 베네는 몽골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편의점과 카페 중 하나다. 그만큼 몽골에는 한국 문화와 한국어가 생활 속 깊숙이 들어와 있다. (국뽕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다.) 그만큼 한국어에 대한 수요도 상당하다.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나도 즐겁게 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섯째, 나는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싶었다. 내게 이미 익숙하거나, 사람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곳에 가기보다는 새 길을 개척하고 싶었다. 그런 모험이야말로 내 삶의 지평을 확장하고 나의 세계를 더욱 다채롭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혹자는 무모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모험이 언제나 낭만과 희망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도전해야만 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고,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 도전은 내 삶에 재미있는 이력이 될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이것이 내가 몽골의 외국인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한 까닭이다. 나는 기꺼이 지원서를 작성했고, 내 1 지망 파견지는 몽골 울란바타르였다.



4.21. 얼마 전 보고 온 테를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근사한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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