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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릇 Jul 02. 2022

이젠 정말 다 괜찮아졌어

마음의 진폭이 넓어졌고, 나는 이제 더 잘 공명할 수 있게 되었는걸

대학 재학 중에 학생회를 참 열심히 했다. 학생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았고, 행사를 기획하고 꾸려나가는 일 자체에서 큰 보람도 느꼈다. 그토록 애정하던 공동체였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휘몰아치고 난 뒤에는 아무와도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난 달 학생회를 함께 하던 언니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생일 축하 겸 보낸 카톡에 언제 얼굴 보자는 답변을 보낸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언제 얼굴 한 번 보자'라는 말로 시작하는 식상한 답장일 줄 알았는데. 이 언니, 제법 만남에 진심이었다. 학생회 하는 동안 만난 사람 중 정말로 존경하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 만남에 기대가 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망원동의 한 채식 식당에서 만났다. 언니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것을 기억했고, 주변에 채식 식당이 많은 망원동을 우리의 약속 장소로 잡았던 것이다. 끼익-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자리잡고 앉은 곳에는 차가운 아이스커피가 올려져있었고 안부를 물으며 우리는 대화의 물꼬를 텄다. 회사 생활이 어떤 지, 분위기는 어떤 지, 요즘 어디에 사는 지 이런 것들이었다. 얘기하다보니 우리 팀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서비스 개발을 언니네 회사에서 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 줌으로 굴러가는 세상같다며 낄낄 웃었다. 


점심만 먹고 헤어지려 했는데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고 낮술을 갈겨보기로 다짐했다. 안 그래도 재밌는 대화에 맥주가 끼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언니가 눈썹을 찡그리는 모양새, 별 것 아닌 농담까지 쉼없이 웃어대는 바람에 코어 근육은 열일 of 열일을 해냈다. 눈물샘도 제법 찔끔찔끔 역할을 수행했다. 아, 참 재미있고 편하다. 그런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했다. 빈 말이 아니라 언니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함께 학생회 하던 시절, 업무를 조직하고 배분하며 총괄하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감수성과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효용성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전문가였다. 


그런 사람이기에 오늘 이야기를 꺼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지나온 사건들을 열거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저 흙에 물이 스미듯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왔다. 닫힌 문을 애써 열어젖혀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그냥 툭. 툭하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언니에겐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성폭력 사건이 있고 나서 나는 공동체 구성원 중 하나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기에 마음으로 그 사건들을 삼켰다. 나 하나가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온전하게 따뜻한 공동체일테니까. 


당시 나는 학내 미투운동 해결의 중심점에 서있었고, 해결 운동을 해나가는 자로서 성폭력 피해생존자로 스스로를 명명할 수가 없었다. 말을 또 지어낸다고 손가락질할 사람들의 모습이 선연했다. 게다가 학내 미투 사건들 중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었고, 그 과정에서 피해생존자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해야만 하는지 지켜봤다. 그걸 보고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4년간 나의 입은 완전히 닫혔다.


"언니, 사실 4년 전에 성폭력 사건이 있었어."

내 한 마디에 언니가 반문했다.

"우리 학생회에?"

"응"


그리고 담담하게 말을 풀어냈다. 나에게는 2017년이 도려낸 시간 같았다고.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느낌이었고 그 사실이 나를 미치도록 괴롭게 만들 때가 있었다고 말이다. 성폭력 사건들로 인해 마음의 거리가 생긴 뒤 더 이상 공동체의 모임에 속하지 못하게 되면서 되려 '내가 문제가 있어서 나를 찾는 자는 아무도 없는건가' 생각이 들었다. 1년을 온전히 학생회에 투자했는데 공동체에서 똑 끊겨나가자 과거의 시간까지도 부정당하는 것 같았으니까.


사라진 스물 하나, 그리고 견뎌낸 성폭력 사건 이후의 시간들을 다 이야기했을 땐 언니의 눈에서 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휙 눈물을 훔치는 손짓, 눈을 질끈 감았다가 옆으로 돌리는 시선, 아랫입술을 꽉 깨문 입이 보였다. 표정이 이미 다 말하고 있었다. 그 때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견뎌주어 고맙다고.


언니 나 이젠 정말 다 괜찮아

정말이었다. 나는 이제 정말 괜찮다. 4년의 시간이 흘렀고 가해자를 보기도 두렵지 않다.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던 시간들도 건너왔다. 그냥 그저 각자 삶을 살아가길, 어느 순간 교차점에서 만나지는 않길 바랄 뿐이다. 괴로운 마음들은 결국 나를 잡아먹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다정하고 따뜻한 나의 주변인들이 품을 내어줬다. 쉬어갈 수 있는 작은 틈 사이에서 존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그렇게 건강한 애정과 아끼는 마음들을 담뿍 전해받아 오롯한 내가 되었다. 


없었다면 당연히 더 좋았겠지만, 과거의 일은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머가리 꽃밭이 되어 정신승리를 좀 해냈다. 고통의 시간들을 겪어왔기에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더 큰 진폭으로 공명할 수 있으리라고. 그들의 모습에서 투영한 나를 보고 나는 그들에게도, 과거의 나에게도 위로를 건넬 수 있으리라고. 그러니까 이젠 정말 다 괜찮다. 사건과 힘들었던 시간으로부터 언젠가 거리두기가 가능해지길 늘 바라왔는데, 그게 어제였다. 언니를 만나고 입 밖으로 말을 꺼내보면서 느꼈다. 아, 이제 나는 거리두기가 되는구나. 나는 모든 것이 괜찮아졌고 이제 내일을 살 준비를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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