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아홉 번 째 단어 : Childhood
나의 어린시절은...하고 시작되는 글을 쓰려고 마음 먹었을 때 사실 내가 쓰고 싶었던 내용은 어린 시절의 디디는 요랬는데 이러저러한 일을 겪고 지금 죠런 사람이 되었다. 참으로 큰 변화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린시절과 지금 나를 비교하면 비교할 수록 요상하리만치 다른 점이 하나 없는 듯하게 느껴졌다. 베이비 디디가 자라서 지금의 디디가 되었다. 머리에 힘 빡 주고 곰곰히 생각해봤자 겨우 생각나는 것들은 태도나 마음가짐이 쫌 불량해진 것 뿐, 그리고 옛날엔 항상 여름을 싫어했는데 지금은 겨울을 싫어하는 것 밖에.
나는 언제나 적당한 온도의 모범생이었으며 갈등은 피하고, 반항 또한 딱히 하고 싶은 마음도 할 용기도 없는 어찌보면 재미없는 말하자면 미적지근한 실온의 인간이었다. 맨 앞줄에 앉아 질문세례를 하는 눈에 띄는 모범생은 아니었으나 언제나 상위권의 성적을 받았고, 절대 분위기 메이커 혹은 인기쟁이는 아니었지만 항상 주위엔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고 평점을 남길 때, 재미가 없었더라도 끝까지 봤으면 3점은 꼭 주는데,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꼭 중간에 하차하지 않고 끝까지 본 다음에 별다른 코멘트 없이 3.5점을 준 후 무슨 내용인지 곧장 까먹어버리는 그저 그런 영화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 We are who we are>를 정주행을 마쳤다. 이탈리아에 있는 미군기지에 내에 살고 있는 별종 틴에이져들의 이야기를 다룬, 술냄새랑 담배냄새가 나는 하이틴. 조금 이상하지만 귀여운 그리고 또 치열하고 슬픈 청춘성장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십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주 착실한 코리안-모범생-유교걸로 살아온 나로써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왜저래 모먼트들이 종종 등장하긴 하지만. 요상한 매력에 이끌려 밤을 새워 결국 끝을 봤다.
"나는 못 해본 게 너무 많아."
<위 아 후 위 아>를 본 누군가 코멘트란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도 못 해본 게 너무 많아.
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적이 있나?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거나, 강렬한 슬픔을 경험한 적이 있나? 좌절하거나, 도망치거나, 싸워 본 적이 있나? 그리고 한 가지에 푹 빠져서 시간과 감정을 쏟아 온 힘을 다 해 사랑해 본 적이 있나. 기억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나는 친구들하고 사소한 말다툼 한 번을 한 적이 없고. 좋아하는 것들은 많았으나, 그 어떤 것도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주 좋아하게 되더라도 그 마음을 자꾸만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그러다 결국 혼자서 질리거나 혹은 스스로를 탈락시키곤 했다. 너는 이걸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참나. 어이없지만 지금도 자주 그런 짓을 한다. 23년 째 이 뜨뜻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도 열심히..
<위 아 후 위 아>같은 흔들리는 청춘들, 특히 십대의 어린 주인공들이 나오는 성장 영화를 보면 나는 그게 아직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먼 일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숫자로는 분명 그 나이를 지나왔는데 말이다. 이제 키도 다 큰지 오래고, 굳이 술을 몰래 사지 않아도 되고, 반항한답시고 나쁜 짓을하면 스스로 결과를 떠안아야 그런 나이 먹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른이라고 말하기 싫어서 나이 먹은 사람이라고 해봤다) 펄펄 끓어 넘쳐버리는 그런 시기가 언젠가 올까, 아니면 이미 그럴 수 있는 시간을 지나버린 걸까 하는 의심과 불안의 감정들이 문득 문득 내비친다.
적지도 않고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나이에 서 있는 지금, 전엔 없던 이상한 불안함과 두려움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흔히들 말하는 그 "좋은 시절"에 깜찍하지도 그리 재밌지도 않게 살고 있다고 느껴진다. 수십년 후에 이때를 후회하고 있으면 어쩌지?하는 멍청한 두려움들이 가끔 뒤통수에서 아른아른 거린다. 그 두려움은 자꾸 과거로 꾸역꾸역 돌아가서 후회를 만들어낸다. 나 너무나 재미없게 살아왔나? 좀 더 어렸을 때 그랬더라면 아니면 저랬더라면,하면서. 이런 생각엔 끝이 없다.
by.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