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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janjan Sep 21. 2021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

그리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들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 by.040 


  "너는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S가 내게 던진 수많은 질문 중 가장 어려운 물음이었다. 2016년 여름과 가을의 사이, 그날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캠퍼스에서 잠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대충 흘려보내던 시간이 갑자기 초 단위로 느껴졌다. 어떻게 대답했더라. 모른다고 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뜬금없어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갖추고능력을 갖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이날을 떠올리면 그 능력이 더욱 절실하다. 모르겠다고 얼버무린 말 뒤에 저지른 문장 하나, 그 딱 하나를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서다.  

    "근데 나는 좋게좋게 풀 수 있을 것 같아!" 

참나 도대체 뭘 푼다는 거야 얘는. 


느리게 가던 시간은 다시 제 속도를 찾았다. 이후에 우리는 커피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영화도 봤다. 



저기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있다. 


제 발치를 따라오는 어둑한 형체가 없는 걸 알고 난 후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뭐가 그렇게 사뿐한지 어느 날은 조금 부럽기도 했다. 내 머리는 면봉만큼 작아졌다가도 호박만큼 커진다. 여기 있다가도 없는 사람처럼 테두리는 선명하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한다. 그림자가 몸집을 불리기라도 하는 날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림자가 왜 저렇게 크니, 왜 그림자를 달고 사니, 이상하게 생겼네, 튀고 싶니, 잘못됐어! 한참 잘못됐어... 웅성거림은 나를 더 불안하게만 했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멀찍이 서 있다. 나는 소리치며 물었다.  

    "그림자가 없이 사는 건 어떤 기분이야?"  

    "글쎄, 편하다고 해야 하나? 가끔은 무서웠거든. " 

맞아 나도 무서워. 있는 힘껏 달려봐도 그림자가 날 따라오니까. 갑자기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니라서, 혹은 흐려지는 그림자처럼 나도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그는 이어 말했다.     

   "모양이 계속 변하니까 불안하더라고. 이제 수군덕거리는 사람들도 없고,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어."  

   "그림자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빛을 맞지 않으면 돼" 

표정 없는 얼굴이 조금 더 멀어졌다. 새카만 사람들이 웅성 인다.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다. 가끔은 소름 끼치게 까르르거린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곳에서 말이다.



곧게 나아가는 빛은 불투명한 물체를 만나면 반사되거나 흡수된다. 

불투명한 물체 뒤에는 빛이 닿지 못한 부분이 생겨 까맣게 보이는데 그것이 그림자이다. 영영 새카맣게 살 수도 있다. 그러면 그림자에 불완전한 생각을 투영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다가 정말 그 무엇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로 보기 좋게 남들 눈을 피해 다닐 수 있을 거다. 그치만 어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건 평화가 아니다. 조용한 평화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빛은 흔들림 없이 직선으로 뻗는다. 그림자는 빛을 마주한 사람의 뒤에만 생기는 것이다. 




S야, 그날은 내게 처음 그림자가 생긴 날이었어. 그래서 잠깐은 그날을 잊고 싶었어.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따위는 던져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어. 영영 모르는 애로 남았을 수 있었지만, 이미 알아버린 이후엔 더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거 우린 알고 있잖아. 


다시 말해볼게. 그날은 내가 빛을 머금은 날이었어. 쏟아지는 빛이 내 팔과 다리에 꺾여 나갔어. 너희를 보면 눈이 부셔 가끔 눈물이 났어. 너희에게 다가가는 걸음마다 용기가 필요하기도 했어.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짙어지는 대비에 마음이 무너지기도 했어. 포기하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다시 숨고 싶기도 했어. 한쪽은 밝고 한쪽은 어두운 얼굴이 무서웠어. 반쪼가리 얼굴, 반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아. 저 멀리 새카만 사람들을 등지고 그쪽으로 가볼게. 네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까. 어쩌면 난 평생 완전한 빛같은 건 되지 못할 수 있어. 그치만 그림자를 두려워만하며 도망치고 싶진 않아. 다시 돌아가지 않을게. 반짝이는 너희를 향해 걸어갈게. 그 길에서 수없이 고민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도울게. 그림자가 가장 짧아질 때까지 우린 천천히 나아가자. 



언제나 어려웠다. 머릿속이 말풍선으로 가득 차서 터질 것만 같았다. 우연히 새어 나온 말들엔 힘이 없었다.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 지식이나 생각을 말했을 때의 역풍이 두려웠다. 그렇지만 발끝만 봐서는 나아지는 게 없었다. 눈을 감고 얻은 고요함은 사실 적막에 가까웠다. 눈을 뜨자. 빛나는 내 친구들을 보자. 나에게 처음 그림자를 준 내 친구들에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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