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머즈 Dec 28. 2022

세러데이가락마켓의 시작점

지역에서 우리가 해왔고 계속할 수 있는 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세러데이가락마켓을 준비하면서, 한껏 흥이 났던 우리는 브랜딩 과정 중 심심찮게 언급이 되었던 보마켓을 떠올렸다. 보마켓은 여러 로컬 관련 자료에서 빠지지 않는 샘플에 가까웠다. 여러 기사와 자료들을 통해 동경을 품고 있던 나는 이미 성수에 있는 보마켓의 팬이었다. 자료들에 따르면 보마켓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가까운 곳에 있었던 슈퍼마켓의 폐업이었다. 작은 불편과 그 해소 욕구 - 지역의 필요를 반영했다. 지역의 쇠퇴 시설에서 시작해 조용하지만 강한 붐을 일으키고 있는 동네 마켓이 이제는 힙한 공간이 되었다. 


보마켓 서울숲점




세러데이 가락 마켓을 상상하며 흥에 겨운 우리는 와, 이 정도면 보마켓을 초대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시작했고, 나는 또 무슨 용기였는지 보마켓 대표님께 DM을 보내 우리가 하고 있는 생활상권 사업에 대한 설명과 메일을 발송했다. 이 사업에 대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만남을 청했다. 


그 당시의 설렘고 떨림, 회환을 유튜브 별별팩토리 채널에 기록해 두었으니 한번 보셔도 좋을 듯 ^^




며칠이 지난 뒤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우리는 환호를 질렀다. 

용산의 보마켓을 가기 위해 좁은 골목을 이리 저러 오르락내리락했던 그 떨림의 순간을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콜라보는 진행되지 못했지만, 그때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대표님의 말씀이 있다. 


"시작을 하고 보니 너무나 감사하게도 동네 분들께서 정말 많은 말씀들을 해주셨어요. 보마켓에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식의 말씀이셨는데, 그걸 반영해 조금씩 보완해 나갑니다. 그래서 계속 사랑해 주시는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하죠" 


이 문장이 당시 내게 얼마나 큰 영감을 주었는지.. 솔직히, 대표님께서 세러데이가락마켓의 초대에 응해주지 않으셨어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정말이다, 당시의 나는 연락을 주시고 만나주신 것만으로도 나의 간절함에 응답을 받는 기분이었고, 이 문장 하나가 많은 영감과 실행을 만들게 해 주었으니까. 


지금의 보마켓은 그저 힙한 공간이지만, 작지만 반복되는 불편함(차를 타고 마트에 갈 정도는 아니고 갑자기 필요한 게 있을 때 집 가까이에서 해결하고픈 생각)을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시작해 주민의 수요를 해결하고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피드에 오르며 사랑받는 매장이 되어가는 게 가능하다는 거였으니까. 대표님도 하셨으니 우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런데, 세러데이가락마켓이 어느 날 뚝딱 시작된 걸까?

나는 늘 골목 안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그들의 일상과 재능을 펼쳐 다양성을 보태는 그림을 꿈꾸었다. 그중 내가 주목하고 있던 것이 대학로의 마르쉐다. 그것은 흡사 학창 시절 외롭고 힘들었던 유학시절,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나에게 외국의 자유로운 일상을 선사해 준 주말 장터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대학로의 마르쉐가 시작하던 무렵, 당시만 해도 바쁜 회사 생활을 했던터라 새벽에 출근해서 자정 언저리에 퇴근을 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런 바쁨 속에서 한 달에 한번, 주말에 대학로를 향한 나들이는 늘 내게 쉼과 여유를 선물해줬다. 두둑이 현금을 챙겨가서 여유롭게 마켓을 구경하고 쇼핑을 즐겼다. 내가 사는 물건의 생산자를 만나고 소통을 하며 그 사람에게 직접 비용을 치르는 과정은 내가 힘들게 일해 번 돈을 가치로운 곳에 쓴다는 느낌마저 전해 주었다. 게다가 나는 두 아이와 함께 하는 경험을 더욱 특별하게 느꼈다. 마트에서 비닐에 포장되어 있는 공산품 쇼핑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채소를 보여주고, 그것으로 만든 음식을 맛보게 하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수제 햄이나 비건 케이크, 수공품을 느끼게 하고, 짚단에 쌓인 계란을 구매하는 경험을 주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난 마르쉐를 열심히 다니며, 내가 매일 바라보는 골목에 그 장면을 실현하고픈 상상과 내가 셀러로 참여해 저런 정성 들인 제품을 만들어서 팔아보고 싶다는 생각. 그 두 가지가 공존했다. 그래, 이제와 고백하지만, 이 마켓의 시작 지점은 여기었다. 나도 이 동네의 주민이기에 나의 결핍이 점점 일을 키웠다는 고백을 못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또 고백하지만, 난 당시 무척이나 어리석게도 '내가 만들 수도 있는' 수공품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만들고 말지'.. 와 '나도 셀러가 되어볼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거다.)


마르쉐의 초창기부터 명동, 성수, 인사에 진출할 정도로 유명해 진 이후까지. 꽤 오랫동안 나는 충실한 팬이었고, 거기에 더해 문호리의 리버마켓, 띵굴 마켓이나 마켓 움 등 다양한 마켓들을 쫓아다녔다. 퇴직 후에는 더욱더 열심히 관찰을 하기 시작했는데, 직접 수공예를 해 본 후 직접 대량 생산은 어렵겠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계속 기획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주변에 마켓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을 찾아냈고 함께 탐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현장에 가서 보고 연출이나 운영해 대해 관찰을 하며 마켓에선 산 제품들을 펼쳐 놓고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일단 그곳엔 직접 가서만 보고 살 수 있는 거리들이 있었고, 실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특히나 주목했던 건 어느 때부턴가 압구정동 거리에 펼쳐지던 띵굴 마켓이었는데, 세가프레도 외에는 공실이 그득한 그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그 틈새에 남아 있는 식당과 카페를 찾아 인근으로 퍼져 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평소엔 텅텅 비어 있는 상권이 마켓이 열리는 날이면 가족단위 사람들로 이동이 불편할만큼 붐볐다. 








경험의 시작 

2013년 마을공동체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2014년 퇴직 후, 나는 마을에서 엄마들과 함께 사부작사부작 일을 펼쳤다. 당시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받은 마을예술창작소를 위해 공간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엄마들의 책모임에 들어가 함께 의식을 쌓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했고, 토론을 했으며, 얘기가 나온 것은 즉시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딱 좋았던 시기, 딱 좋았던 공간이었다. 조금씩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생각들이 보태지며 점점 공간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열정들을 모아 처음 해본 것이 2015년의 루다 마켓이었다. 작지만 메인이었던 공간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인형극 공연을 했고, 함께 배우며 만들어온 발도르프 수공품이나 먹거리 등 소소한 제품 판매들도 이어졌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평소 스치기만 했던 이웃들도 금세 모여들었던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꺼리가 있고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주변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인가를 더 이어갔던 마켓은 몇년 뒤엔 조금 규모를 키워 공원으로 진출했다.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람들이 많이 올까? 라는 걱정이 무색할정도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많은 사람들이 마을 안 공원으로 몰려들었다. 





공공의 장소인 공원이기에 우리가 수익을 올리려는 판매는 지양했지만, 지역의 다양한 능력자들이 그들의 재능을 나누고 그들을 알릴 수 있게 했다. 꽃집에서는 식재를 하는 체험을 팔았고, 미용실에서는 컬러를 넣어 머리를 땋는 체험을 진행했다. 마을의 소상공인뿐만 아니라 풍부한 인적 인프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캘리그래피를 하는 할아버지의 캘리그래피 체험이나 버블바를 반죽해 만드는 체험 등이 진행되었다. 이 외에도 플리마켓의 판매자를 모았더니 집에서 혼자 수공예를 하던 엄마들이 제품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고, 아이들이 자기가 소중하게 사용하던 물건을 이고 지고 마켓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 수공품으로 마켓에 참여했던 엄마들 중 몇은 사업자가 되었고, 그 인연이 세러데이가락마켓 셀러 참여로 이어지고 있다.  






작은 성공경험의 누적이 중요한 이유 


이런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왔다. 뜻을 모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마켓 기획 회의를 통해 조직적으로 관공서 협의, 셀러 선정, 홍보자료 제작 및 발주, 주변 홍보, 준비물 발주 및 대여 등 행사 진행에 필요한 스킬들을 배워 나갔다. 우리의 성장에 맞춰 규모를 조금씩 키워갈 때마다 우리의 열정은 커졌고, 독수리 오 형제에서 칠형제, 십몇형제쯤이 될때까지 이어지던 행사는 코로나 시대가 막을 올리며 중단이 되었다. 한편, 한 번 두 번 마켓을 거듭해 갈 때마다 새로운 불편과 욕구들이 들려왔고 우리는 그걸 보완하고 해결하기에 애썼다. 이런 과정 중에 우리는 지금 세러데이가락 마켓을 위한 능력을 조금씩 조금씩 키워왔던 것 같다. 

아,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건 딱 하나다. 마을 잔치엔 모름지기 전도 좀 부치고 막걸리도 한잔 할 수 있는 소위 '기름 냄새 좀 풍기는' 코너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서 못쓰겠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이다. 애석하게도 그건 우리가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듯한데, 행사를 할 때마다 누구보다 유심히 현수막을 바라보고 날짜를 기다리는 소중한 분들이라 어찌 해결해야 할지는 계속 고민 중이다. 






이제 막 탄생한 세러데이가락마켓 (since 2022)


여전히 같이 하고 있는 주민도 있고, 지금은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보상 없는 봉사활동에 지나지 않았으니 흥미가 떨어지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생업으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정책사업을 통해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활동도 불가능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어느날 기록으로만 남을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수년간에 걸친 이런 작은 시도들이. 2022년 세러데이 가락 마켓의 시작을 만들었다는 걸 기록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세러데이 가락 마켓만을 바라볼 때. 적어도 나는. 그 모든 과정에 있었던 나는 그 시간의 경험들 속에 등장하고 사라졌던 많은 주민들의 숨은 노력과 열정을 기억하고 있다고. 


자, 이젠. 현장을 만들었던 사람들에서 과정 중에 많은 이야기를 보태며 함께 즐겨주었던 사람들까지.(불편러에서 정성스런 후기를 남겨 주었던 그 모든 분들!) 그들 모두가 공동의 창조자가 되기 위해 설계했던 기획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작가의 이전글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