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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한 마음 Jan 15. 2021

소소하지만 풍요로운 데이트

나와 만나는 시간

오전 아홉 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아파트 계단을 오른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느새 10층

우리 집 현관문 앞에 다다른다. 집 앞 공원을 걸으며 아직은 차갑고 새침한 아침 공기를 고 싶지만 오늘도 미세먼지 빨간 경보를 확인하고 계단 타기 정도를 선택한 것이다.


집안에 들어서면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곧장 부엌으로 가 크림치즈를 바른 간단한 토스트나 과일 따위로 가벼운 아침을 챙긴다. 그리고 믹스커피를 한잔 탄다.

믹스커피는 자고로 일터에서 바쁜 일과 중 잠깐의 여유를 틈타 마시는 게 제 맛이지만, 식구들을 모두 보내고 시작하는 엄마의 일상 첫 번째 루틴의 맛으로도 제법 괜찮다.

평온한 아침의 필요조건 같은 것이랄까.


믹스든 아메리카노든 따뜻한 커피 한잔과 그날 내손이 가닿은 책에 마음이 한참 머무르고 그러다 감탄하는 구절을 만나면 노트에 옮겨 담는 시간, 평온하고 정돈된 여유를 누리는 아침을 나는 사랑한다.     


미세먼지가 없고 볕 좋은 날이라면 나는 대개 집안에 머물러있기보다 바깥 산책을 택한다. 집 앞 공원이 제일 만만하긴 하지만 집에서 이십 여분은 걸어 나가야 만날 수 있는 탁 트인 풍경을 더 좋아하고 말이다.


깊지도 얕지도 않은 강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

그 길을 걷다 마주치는 곧고 탄탄한 몸매의 나무들을

나는 한참을 우러러보다가 이따금씩 한 손으로 쓰담쓰담 어루만져 본다. '너희들 참말로 예쁘다' 하고 속삭여준다. 그리고 다시금 열심히 걷다가 멈추어 선 채로 이번에는 강물 위에 무리 지어 떠다니는 오리들의 자맥질을 구경한다. 고요한 듯 보이지만 살아있는 것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엿보며 그렇게 걷다 멈춰 서다를 반복하는

나의 산책길.


머릿속에 그득히 쌓인 잡념의 부스러기들을 비워내고

대신 살아있는 것들이 뿜어내는 충만한 에너지를 흠뻑 빨아들이는 시간.  나는 그 시간 또한 무척이나 애정 한다.    


전생에 나는 한량이었나 싶을 만큼 이렇게 느긋한 시간들을 탐하지만 늘 그렇게 팔자 좋은 여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 마감 글을 끝으로 글쓰기 모임방을 나간 명희쌤이 선물처럼 툭 남기고 간 공통주제 덕분에

‘내가 나다워지는 시간’, ‘내가 가장 온전히 충만해지는 순간’을 떠올려 보게 된 것이다.

그랬더니 삶의 여러 순간들이 떠올랐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벗함께 누리는 오붓하고 따뜻한 순간,

낯선 여행지에서 팔딱팔딱 살아있는 나와 만났을 때 느끼는 희열의 순간, 진리에 대한 치열한 탐구나 깊은 사유의 끝에 다다르는 적 고요의 순간지.


하지만 가장 온전히 나다운 시간은

소박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지금 그대로의 나와

홀로 차분히 마주하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커피 한잔의 여유와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

햇살 가득한 한낮의 산책 시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아..  중요한 순간을 빠뜨렸음을 나는 이내 알아차린다. 평일 오전 인적이 뜸한 시간 동네 목욕탕에서 누리는 느긋한 사우나 타임. 적당히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며 내 마음의 심연 속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을 수 있는 시간.

내 벗은 몸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묵은 때를 벗기며 마음의 때도 함께 벗겨내는..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시간이었건만 망할 코로나로 인해 대중목욕탕에 갈 수가 없으니 몹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욕은 집안 욕실에서 하면

되지 않 묻는다면, 내 집 욕조는 작고 내 몸뚱이는 너무 길다는 슬픈 변명을 덧붙이고 싶다.)      





내 안의 ‘나’를 만나고 일상의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풀어내며 ‘나’의 감정과 필요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시간. 오늘도 나는 이 소소하지만 풍요로운 둘만의 데이트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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