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용서
우리가 용서로 알고 있고 또 본인은 용서했다고 믿고 있는 용서 아닌 용서가 있다. 잘못된 용서이다. 이 잘못된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용서했다고 믿게 만들어 바른 용서과정을 할 생각을 못하게 한다. 그래서 아주 위험하다. 계속 상처를 받는데도, 참고 있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느끼지를 못하게 한다. 혹은 분노하면서 자신에게 가해진 악행을 샅샅이 기억해야 하는데 그저 덮어두고 모른 채 해서 나의 자아존중 감을 계속해서 떨어뜨리고 지속적인 가해의 상황에 나를 둔다.
이러한 잘못된 용서는 용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어서 발생한다. 또한 자신에게 가해진 악행을 기억하고 애통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혹은 분노를 품고 있기가 너무나 괴로워서 취하게 되는 행동이다. 이러한 유사용서는 진정한 바른 용서가 아니기 때문에 앞에서 얘기한대로 자아존중감의 하락이라든지 지속적인 가해상황에 자신을 노출하는 등의 많은 부작용이 있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는다. ‘화’를 더 키우지 않는다는 점이 약간의 긍정적인 면이긴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화를 품고 분노하는 것이 더 건강할 수 있다. 그래야만 적어도 자존감을 지키고 가해의 상황에 더 이상 자신을 노출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용서에는 용서와 혼돈되는 ‘유사용서’와 ‘거짓용서’, ‘성급한 용서’가 있다.
-유사용서 (용서와 혼돈되는 것들)
먼저 용서로 보이는 유사용서에 가해자에 대한 변명이 있다. 자신에게 악행을 한 가해자를 무슨 이유에서든 변명해주는 것이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든지 혹은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악행으로 인한 상실의 아픔을 덜 느끼려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에게 행하는 행동에 대한 무관심 역시 용서와 유사해 보인다. 또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도 해당된다. 가해자에 대한 변명, 상대방의 가해 행동에 대한 무관심, 상대방의 가해행동을 묵인하는 것, 이 모두가 용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용서가 아니다.
이러한 행위를 하게 되면 상대방은 아무런 죄책감없이 같은 가해행위를 지속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자존감의 추락을 겪는다. 나는 쉽게 용서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용서라고 하니 용서란 약자가 하는 행동이고 약자가 선택하는 것이란 오해를 낳게 된다. 이건 단연코 용서가 아니다.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취하게 되는 자기방어의 행동이다.
또 하나 용서로 보이는 용서와 혼돈되는 것으로는 망각이 있다. 즉 잊는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진 악행을 애써 잊는 것이다. 기억하면 고통스러워서 현재를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망각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으면서 내 성격의 지뢰밭을 형성할 뿐이다. 즉 나의 삶에 알게 모르게 악 영향을 미친다.
사춘기의 그녀는 가까운 친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수치스러워 애써 그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서 잊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기력에 빠져서 일상을 해 나기기가 힘들었고 때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등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그 후 상담을 통해 성추행을 경험한 수치스러운 일로 인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망각해서 내 안에 억압해 놓은 상처와 악행은 때로는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크게 터지기도 한다. 그리고는 도대체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이는 오랜 시간의 정신분석을 통해 찾아내기도 한다. 그래서 용서로 해결하지 않고 망각으로 밀어 넣어 버리는 것은 무엇보다 해롭다. 그때 잠시는 넘어갈 수 있어도 마침내는 내 삶의 발목을 잡는다.
따라서 망각은 나에게 가해진 악행을 해결하는 좋은 전략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바른 용서만이 우리가 선택해야할 좋은 전략이다. 용서과정을 겪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용서를 통해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상처의 기억을 억압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상처를 해결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상처의 독소를 내 삶 전체에 퍼지게 할 뿐이다.
이밖에도 시간이 흘러서 상처로 생긴 분노가 줄어드는 것이나 상처를 계속 받으면서 참는 것도 용서로 오인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용서는 ‘화’를 더 이상 키우지 않고 어느 정도 현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앞에서 얘기했듯 약간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해 내면으로 더 큰 해를 키울 수 있다.
-거짓용서
거짓용서는 전혀 용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했노라고 믿는 상태이다. 이것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자기방어이다. 용서는 정서적으로 인지적으로 행동적으로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즉 가해자에게 좋은 감정이 생기고 가해자가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공감을 해서 가해사건을 인지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적으로도 여건이 되면 화해를 시도하는 등 우호적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가해사건이 준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어 영적인 성숙을 꾀하는데 까지 가야 참된 바른 용서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변화는 전혀 없이 입으로만 용서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반증이다. 간단히 말해 “그까짓 거 용서 했어!”라고 말할 때 거짓용서일 확률이 높다.
-성급한 용서
용서는 한 번의 결심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즉 용서하겠다고 마음먹음으로써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계기로 용서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 또 다시 그 사건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솟는 일이 반복되지 않던가. 용서한 줄 알았지만 용서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 용서하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용서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렵게 어렵게 결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용서하기로 결정한 뒤 용서과정을 거쳐야만 그래야만 진심으로 용서가 되어진다. 그렇게 할 때 상처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사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용서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용서하고, 용서했다고 믿는 것은 성급한 용서이다. 용서과정에는 악행을 기억하면서 충분히 분노하고 슬퍼하는 애통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은 다시 한번 악행을 생생히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가해로 인해 무너진 자아존중 감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상처가 치유된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하는 용서는 머리로만 한 용서이고 머리로 한 용서는 상처를 헤집게 될 때 분노로 여전히 고통을 겪게 된다.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고 영원히 그 사건에 구속된다.
영화 밀양에서는 이러한 성급한 용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신혜는 유괴해 아들을 죽인 살해범을 자신이 믿게 된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용서하기로 한다. 그러나 살인범으로부터 자신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모두 용서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낸다는 말을 듣고는 애써 유지했던 평정이 깨지면서 해결되지 않은 채 묻어두었던 분노가 폭발한다. 그리고 신에게 대항하고 스스로를 자해하며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린다.
용서하기 전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생략한 채 성급하게 용서하고 그리고 용서했다고 믿은 것이다.
이렇게 애통의 과정을 생략한 용서가 성급한 용서이다. 성급하게 용서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용서하기 전에 분노를 품은 채 충분히 분노하고 애통해 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