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나를 두고
목감기와 몸살로 고생한 지 오늘로 나흘째, 아내는 집을 나갔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부인할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아내가 모든 것을 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안일을 같이 해본 적이 없었는데, 퇴사한 이후로 집안청소와 설거지, 화장실 청소와 재활용 및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첫째 아이의 학원 픽드롭을 하고 있다. 하루가 이렇게 빨리 지나감을 새삼 느낀다. '집안일'이라고 별생각 없이 떠들던 일이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물론 십 년 내공의 아내에겐 보통 일도 아닌 것이겠으나, 버거움에 숨이 찬다.
그런 아내가, 알아서 밥을 챙겨 먹으라는 외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아직은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쑤시고, 목도 아프고 몸살기도 남아있는데 그런 날 놔두고 집을 나간 것이다. 철없는 마흔다섯의 남편은 서럽다. 아내는 늘 집에 먹을 거 많다고, 알아서 해 먹으라는데 내 눈엔 통 보이지 않는다. 내가 먹을 것, 이라 함은 아내가 해 준 뜨끈한 솥밥과 시원한 뭇국, 그리고 초등학생 입맛의 남편을 위한 스팸구이 정도인데 이걸 알아서 해 먹으라니.
나가기 전부터 아내는 근처 갈만한 식당들은 찾고 있었다. 블로그의 평들을 보면서 하나둘 제치는 손맛으로 외출과 외식의 설렘을 사전체험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간, 8시 반이 넘어 퇴근하는 남편을 위한 저녁을 계속 차려 준 아내의 하루 외출이 뭐 그리 큰 일이겠냐마는, 나의 저조한 컨디션과 '환자'가 된 나를 좀 챙겨달라는 투정이 아니었겠는가. 아내는 함박 스테이크를 먹으러 간다 했다. 저녁까지 있을 딸아이의 학원보강까지 마치고 오려면 9시는 돼야 할 텐데 갑자기 주어진 나만의 시간도 이젠 걱정이다.
아, 뭐 대충 있는 거 챙겨 먹고 책 보고 글 좀 쓰면 하루가 잘 갈 텐데 뭐 그리 유난인가 싶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커지는 아내의 존재를 절감한 이가 아니라면 생각의 궤를 함께하긴 어렵겠다. 나의 가사 참여는 독립을 위한 준비가 아닌, 같이 참여하는 일부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부가 10시간 가까이 없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몰고 온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아내도 숨 쉴 곳이 필요하고 가족을 제외한 이와 나눌 수 있는 어두운 얘기들을 열정적으로 떠들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내 현실로의 복귀를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아내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하겠지. 혹여 맛있는 무언가를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상상과 함께.
그럼에도,
복통으로 한 시간 만에 귀가하길 바라는 마음이 저 밑에서 자꾸만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