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다.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된다.
더불어 아내의 개학식이다.
1-2주 전부터 아내는 분주했다.
보통 독서모임을 위한 준비나 가계부 작성이 아니면 아내는 노트북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아내가 얼마 전부터 분주하게 무언가를 작성하고 계획하고 또 고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집을 펼쳐놓고 한참을 생각하고 또 인터넷 서점에서 뭔가를 찾아보고 노트에 끄적이며 노트북으로 옮기는 작업을 한참을 진행했다.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작가의 작품에 대한 내용들을 독서모임에서 공유하기 위한 준비에 꽤 열심이었다. 그 이후로 뭘 이렇게 골몰하며 준비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그것이 오늘 이후부터 3월의 개학 전까지를 위한 준비였음을 알게 되었다. 다들 이렇게 계획하고 준비하고 체계적인 방학을 보내는지 모르겠다. 등록한 학원을 꾸준히 가고 숙제를 성실히 하고 작년에 배웠던 내용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다. 그런 면에선 이제 초4가 되는 딸아이가 방학 동안 작년에 배웠던 국어책을 계속 정독하고 싶다고 한 것이 대견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도서관과 친해지려 애쓰고 많은 책을 읽게 해주고 싶었던 우리 부부의 계획이 유효했음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는 공부와 관련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당장 내일부터 하루 세끼에 대한 준비, 즉 식단도 정해야 한다. 우선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활용하여 할 수 있는 메뉴들을 정리한다. 내가 도움을 줄 수도, 도움이 되지도 않는 분야다. 그저 설거지 열심히 하고 음쓰를 착실하게 버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아, 물론 특식으로 가끔은 계란 라면을 아주 잘 끓일 수 있다. 적당한 물과 강한 화력, 약간은 설익은 면발을 추구하는 예전 동네매점 스타일의 라면은 가족들의 선호가 매우 높은 메뉴라 이 정도의 기여는 충분히 가능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는 것보단 나을 텐데, 앞으로 두 달간 하루 세끼 밑반찬과 식사를 준비하는 계획은 이와는 좀 다른 문제다. 대충 있는 거 알아서 두 끼만 먹고 끝내,라고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제 며칠 뒤면 결혼 10주년임에도 이런 모습은 볼 때마다 놀랍다. ISTJ의 아내가 변신하는 순간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작업은 비워내는 것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보통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재료들을 활용하여 할 수 있는 것들을 즉흥적으로 생각하는데 아내는 조금 다르다. 나름 계획을 세워 재료를 구입하고 시간이 허락할 때 만든다. 어제저녁의 비스코티가 그랬다. 아몬드가루, 아몬드 슬라이스, 초코칩, 쿠키용 밀가루, 베이킹파우더로 시간을 들여 간식을 준비했다. 맛있다. 그거면 되었다. 그런데 이 또한 아내는 본인의 개학을 준비하기 위한 예행연습이었던 것이다. 유독 이번 방학이 아내에게 중요해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초4가 되는 첫째 딸아이 때문에? 아니면 이제 초2가 되는 둘째 아들의 공부습관 기르기에 매진해야 하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아내는 주어진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기 위해 애쓰려 하고 있고 생산성에는 계획이 필요하며 예측 가능한 결괏값이 있어야 한다. 지난 2주간 근처 교보문고에서 문제집을 여러 종류 심혈을 기울여 찾아보고 돌아오고를 반복했는데 만이천 원 하는 문제집 한 권을 고르는 데에도 아내는 어떤 기준을 적용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제 한 시간 뒤면 방학식을 마치고 아이들이 돌아온다.
아내의 제안으로 우린 아내의 개학을 앞둔 '마지막' 브런치를 즐긴다. 연어 아보카도와 프렌치토스트,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지금의 이 시간, 이 여유가 좋다. 절로 감사하게 되는 시간이다.
아내는 여전히 식단을 작업 중이고 나는 글을 쓴다. 25년도에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추가적인 계획을 잡고 출간작가가 되겠다는 올해의 목표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좀 더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한다. 최근 들어 이런 여유를 즐겨 본 적이 있었나. 곧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시작할 텐데 그전까지 난 가족과 함께하는 이런 소소한 시간들을 완벽하게 즐기고 싶다. 어수선한 시기라 멀리 떠나진 못해도 가까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남편의, 아빠의 역할을 성실히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여전히 부모로서 아이들의 교육에 도움이 되는 장기적인 시각은, '좋은 습관'을 물려주고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틀을 계속해서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내의 이런 모습들을 관찰하고 궁금해하고 대화하고 도움을 주고받고 하는 이런 모든 과정이 아이들의 일상에도, 앞으로의 삶에도 따뜻한 그림을 그려가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내의 개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