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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story Jan 03. 2025

아내의 ToDo List

아내는 다이어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동네 지인에게 받은 모 기업의 2025년 다이어리를 받아서 쓰고 있다. 11월 말부터 이런저런 다이어리를 검색해보기도 하고 꼼꼼하게 살펴봤으나 '있는 거 쓰자'는 결론이었다. 나 역시도 격자 스프링 노트에 세로로 선을 긋고 한 페이지에 이틀의 기록을 한다. 가끔 책을 읽고 기록해야 할 내용들이 넘치는 경우 조금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쓰기도 하지만 대게 하루에 반 페이지를 쓴다. 구조는 간단하다. Gratitude, Top Priority, Brain Dumps. 


일전에 일론 머스크가 활용하고 있다는 생산성 툴인 Time Boxing과 관련된 영상을 보고 이를 나에 맞게 조합하여 활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실 '어떤 다이어리'에 기록하느냐는 크게 의미가 없다. 어떻게 기록하고 관리하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bAYK4KQrso


그러면 아내는 다이어리를 어떻게 활용하고 무엇을 기록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설마 내가 몇 시에 귀가하고 뭣에 얼마를 지출하는지에 대해 기록할까, 아니면 나에 대한 빡침을 기록할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분 단위로 미팅이 있던 작년을 생각하면, 온라인 캘린더의 활용이 불가피했다. 15분, 5분 전으로 일정 알람이 오게끔 하는 것이 너무 중요했고 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 정도의 일정관리가 필요한 상황은 아닐 테니 이런 경우 무엇을 얼마나 고민해서 기록하는지에 대한 것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내의 다이어리, 그녀의 투두리스트가 궁금하다


밥, 빨래, 중고서적 발송, 독서 계획, 식단표 작성, 보험과 적금내역, 생활비 지출, 관리비 등 다양한 내용이 적혀있다. 여기에 초안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작성하고 엑셀에 옮긴다. 아내는 엑셀 러버. 힐끗 보면 진도율이 나쁘지 않다. 벌써 오전에 몇 가지를 끝내고 다음 할 일로 넘어간다. 아이들의 일정과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아내의 일정이기에 '끝내야'하는 일들을 제시간에 마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내일로 미뤄도 생계에 지장이 있거나 할 일들은 아닐 텐데 아내는 보통 이런 일들을 마치고 잠들기 전에는 포스트잇에 내일 해야 할 일들, 그러니까 갑자기 생각나거나 아니면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을 적어두고 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그것들을 다시 다이어리에 옮기고 필요한 정보들은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하교 시간, 학원 픽업시간에 맞춰 외출을 하고 그 사이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아이들 책을 빌려왔다. 아, 책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한 번에 많은 책들을 빌리다 보니 대량 반납사태가 왕왕 발생하고 이는 내 몫이었다. 그래서 부탁도 했었는데 이는 사실 내 개인적 소망일 뿐 아이들과 아내에게 설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이사가기 전 살던 곳에서도 대략 이렇게 책을 빌렸다. 반납일이 두려웠다.


책을 많이 읽고 빠르게 읽고 내용을 정리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아이들과 갖고 있는데 읽은 내용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인풋과 더불어 효과적인 아웃풋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연습이 필요해서 틈틈이 말하도록 시켜본다. 일기 쓰기와 독서노트도 그 일환 중 하나이기도 하고. 


여하튼 아내의 투두리스트에는 나의 그것보다 많은 일상이 담겨있다. 

아내는 Top Priority 한 가지만 정할 수 없는 하루의 연속이다. 남편과 관련된 것이 중요한가, 아이들과 관련된 것이 중요한가, 가계의 재무가 중요한가, 시부모를 챙기는 것이 중요한가, 친정 식구들의 이슈에 관여하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 중에서 한 가지를 어떻게 고를 수 있단 말인가. 꽤 오래전에 본 '아내는 슈퍼우먼'인가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물론 지금 나의 아내는 전업주부이다. 둘째 육아휴직을 끝으로 은행을 퇴사했고 그 이후로 급여소득자의 삶을 산적이 없다. 아주 오래전 일인 것 같은데 아내의 퇴사도 5년 반 전이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06/2016090601501.html


기사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글이지만, 다시 읽어봐도 일을 하며 가정까지 챙기는 아내의 역할은 초인적인 힘을 필요로 할 때가 많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부부도 많은 고민을 했고, 두 가지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면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삶이 당시의 우리로썬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지금은 그러면 후회하느냐고? 그렇지 않다. 나는 아내의 투두리스트를 함께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화장실 청소를 말끔히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를 구석구석 꼼꼼히 하며 다음 해내야 하는 일을 같이 나누고 분업하는 이 구조가 좋다. 물론 아내가 일을 한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하면 되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내와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소유하며 분업을 하며 투두리스트를 지워가는 이 작업이 주는 매력과 기쁨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보잘것없는 사소한 이 루틴이 남편인 나에겐 에너지가 된다. 

더불어 어디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사적인 영역의 시간들도 각자의 충전을 위해 필요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매우 많은 부분 오픈되어 있다. 서로의 생활 패턴이 뻔하기도 하고, 애써 뭔가를 숨기고 잠그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걸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다. 10년을 살다 보니 그런 믿음 정도는 갖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아내에게 고맙다. 지금까지 아내의 투두리스트는 우리 가정을 지켜 주는 토대가 되었고...



그 사소한 기록에 담긴 아내의 성실함이 잠시의 휴식기를 갖는 남편에게 안정을 주는 가정을 완성시켰다.

Since 201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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