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아이스 카페라테를 마신다.
일종의 리츄얼 같은 건데, 한여름이나 한겨울이나 뜨거운 라테를 먹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카페인으로 하루를 충전하듯 시작하는 것이 아내뿐이겠는가마는 이건 아내에게 포기하기 어려운 일부분이 된 것 같다. 청약에 당첨되고 이사를 오기 전, 가계경제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도 밖에서 사 먹는 커피값을 줄여보자는 얘기와 시도도 있었으나 일치감치 접었다. 내게는 아내가 잘 내려진 에스프레소와 저지방 우유 그리고 얼음의 조합을 맛봄으로 인한 효용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이를테면 그날의 감정, 컨디션 같은 건데 아이스 라테 한잔을 위해 지불하는 금액 이상으로 효과가 있었다. 굳이 그 행복을 뺏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그 값을 지불하지 못할 상황 또한 아니었기에 아내의 '행복' 영역에 있는 무언가를 건들고 싶지 않았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주말엔 느지막이 일어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동네 커피전문점에 가서 테이크 아웃을 해온다. 이건 내 루틴이 되었다. 워낙 표현을 안 하는 성격의 아내도 좋다고 말한다.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게 아내의 하루가 시작된다.
아내는 두 아이의 방학 스케줄을 일찌감치 잡아두었다. 매일 해야 하는 학습지 및 문제집을 푸는 일정. 이건 학원 및 운동과는 별개로 집에서 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매일 빠짐없이, 밀리지 않고 주간의 과업을 완수한 아이들은 한 주에 1,000원씩을 용돈으로 받는다. 오전에 이 일정을 확인하고 오늘 해야 하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주지 시킨다. 역시나 아이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푸념과 한숨이 들리지만 역시 아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학교라는 일상의 강제가 잠시 후퇴한 이 시기에 가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게 없으면 여지없이 무너질 시간들임은 우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매일의 학습일정을 누가 놓치지 않고 해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벌써 시작이 좋지 않다.
대게 아이들의 학원 및 교습은 늦은 오전에서 저녁 전에 진행되기에 그 일정에 맞춰 아이들과 함께 나간다. 차 없는 뚜벅이의 결혼생활을 10년째 이어오고 있어 마을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날씨가 괜찮다면 조금 일찍 나가서 걷는다. 아이들이 수업중일 때 아내는 도서관에 가거나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는다. 역시 아이스 라테가 빠질 수 없다. (가끔 궁금한데, 다양한 브랜드의 아이스 라테를 한 입 마셔보고 어디 것인지를 맞춰볼 수 있을까. 아내 정도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읽고 싶어 했던 책들을 빌리거나 이미 대여중인 도서를 예약하기도 한다. 이 사이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보통 한두 시간 정도인데 유일하게 아내가 아이들의 소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Power J 가 되는 아내인데, 역시 이 부분이 가장 큰 이슈인 것 같다. 이제 초4와 초2가 되는 두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최근 들어 본인의 일에 대한 고민들도 있고. 아직 휴대전화가 없는 두 아이들에게 언제 이걸 해줘야 하는 고민도 급부상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남편을 길들이는 것 또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곧 다가올 설 명절을 생각하면 두통이다. 손이 큰 아내는, 올해는 정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글쎄, 모를 일이다. 아내는 스스로 내려놓겠다는 말을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아이스 라테를 마시면 삶의 에너지와 긍정의 기운이 활화산처럼 폭발이라도 하는 걸까. 결국 해야 할 것들을 한다. 그것도 아주 잘. 물론 그래서 고맙고 미안하다. 내가 나의 인생에 대해 진중한 고민을 할 때, 아내는 아이들과 나의 걱정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10년을 살았다.
아이들의 학원이 마칠 때 우리는 다시 모인다.
아내는 아들의 픽업을, 나는 요즘 딸아이의 픽업을 한다. 딸아이의 학원 앞에서 마을버스를 같이 타고 오면, 다음 정류장에서 아내와 아들이 탄다. 마치는 시간대가 비슷하면 이게 가능하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안정감이 찾아든다.
짧은 시간 버스를 타고 밖을 내다보면 슬슬 퇴근 시간이다. 어둑해진 도로와 가로등 그리고 늘어나는 차량들 사이에서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의 여유를 두 손에 쥐고 있음이 감사하다. 그리고 이 옆에 나의 아내가 있음이, 두 아이가 있음이 감사하다. 물론 이 시간 아내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저녁메뉴. 최근엔 격일로 배송이 되는 밑반찬과 음식을 신청하여 받고 있는터라 이에 대한 고민은 줄었다. 그럼에도 가끔의 특식, 간식준비는 여전히 아내를 고민하게 만든다. 가볍게 먹으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는 메뉴에 대한 궁금함은 또 관련 도서의 대여로 이어진다.
좋은 습관이다. 아내는 나와 결혼 후 독서량이 늘었고 매일 같이 도서관에 가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단 한 가지 습관을 물려준다면 그것은 '읽고 쓰는 습관'이라고 줄기차게 얘기했던 남편을 존중하며 스스로도 변했다. 원래도 소설이나 에세이 류를 즐겨 읽던 아내의 요즘 독서는 '자녀교육'이다. 그렇다. 아내는 명확한 한 가지 주제에 몰입하는 유형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이 정리가 될 무렵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러나 한동안은 자녀교육을 '마스터'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아주 찬찬히 정독하는 시간으로 스스로를 다지고 또 현실에 적용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네 식구는 저녁을 함께 먹고 거실 테이블에 모여 앉는다. 나는 책을 읽고 아이들은 그날의 공부를 한다. 아내는 책을 읽고 아이들 공부를 봐준다. 그리고 새벽 일찍 일어나는 내가 가장 먼저 잠이 든다. 5시 전후로 기상하려면 열 시 반을 넘겨서 잠들면 다음 날이 괴롭기에 그날의 마무리는 아내의 몫이다. 늦은 시간까지 깨있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 아이들의 성장 때문인데, 그래서 되도록 아침 일찍 억지로 깨우려 하지는 않는다. 잘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잘 자게 커튼도 걷지 않는다. 내가 미라클 모닝을 한다고 가족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각자의 선호와 리듬이 있는 법이니. 가끔 힘든 것이, 4시 반 정도에 일어나 느지막이 아점을 먹게 되는 상황이 오면 난 6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데 참기 어려울 땐 알아서 차려먹으면 된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본인이 가장 기분 좋을 시점에 컨디션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줄 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경험상 충분히 알고 있다. 결혼 초에 이 사이클이 맞지 않아 몇 번 말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젠 서로 적응했다. 그래서 아내는 내가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않고, 나 역시도 아내의 늦은 기상에 대한 불만이 없다.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면 끝나는 것이니까.
한 동안은 아내의 하루를 계속해서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보다 오늘 주어진 이 시간들을 잘 보내기 위해 애쓰는 아내와 나이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처럼 아이스 라테를 즐기며 건강하게 오래 함께 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