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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story Jan 08. 2025

아내의 말

소모품이라면 출력물은 있어야지

- 어차피 모든 직장의 직원들은 소모품이잖아

- 출력물이 있어야지, 소모품이라면.



 일요일 오후, '나의 완벽한 비서'라는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 나온 대사를 따라 했는데 아내가 대꾸했다. 소모품이라면 출력물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과연 그 출력물이란 것을 꾸준하게 잘 내온 직원이었을까?



 아내의 말은 빈틈이 없다.

여기에서 빈틈이란 문법성과 논리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상황에 지극히 충실하다는 의미다. 아내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표현을 한다. (여기에서 또 MBTI가 떠오르지만, 마흔 중 후반에 접어든 난 혈액형이 익숙하다.) AB형 아내의 가시 돋친 말들이 여전히 나를 쿡쿡 찌르는 와중에 우리는 10년을 함께했고 난 그런 표현들에도 유연하게 적응하는 법을 터득했다.

"오, 이거 잊기 전에 적어놔야겠는데?"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 [아내관찰일지]라는 컨셉도 아내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고집하던 내가, 남들이 읽고 싶어 할 글에 대해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해 볼 여지와 과제를 부여한 셈이다. 지난 10년간 이렇게 우린 '한 팀'으로 성장했다.



 이런 아내이지만 분위기를 살피며 말해야 하는 상황에 융통성은 유지한다. 다만 지극히 제한적이다. 아내는 이런 상황이 예상되는 관계 내지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함께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말'을 숨기며 교묘히 포장하지 않는다. 그것도 감정을 배제한 채 말이다. A형인 나로선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가끔 구매한 물건이나 서비스에 문제가 있을 때, 난 고객센터에 글을 남긴다. 시간 순, 사건의 내용, 판단과 정리의 순으로. 통화를 하게 되면 실망스러운 내 감정이 논리적으로 잘 만들어둔 구조물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내는 정확히 반대이다. 일단 통화를 하고 사실만 전달한다. 핏기 없는 무미건조함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원하는 혹은 절반 정도의 타협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신기한 재주이다.



 그런 아내도 격해질 때가 있다. 왜 없겠는가? 그녀도 사람인데 말이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좀체 타협점이 없다. 그리고 '거들뿐'이라는 미션을 간직하고 있는 나는 그저 도울뿐이다. 그럼에도 가끔 무서운 저주의 말들이 예고 없이 등장할 땐, 두렵다. 매번 그런 것도 아니고 모든 아내들이 그러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각기 다른 면을 오랜 시간 쌓아온 우리는 부부라는 구성 주체 안에서 조화와 균형과 마찰을 반복하며 이 틀 안에서는 견고하고 안정적인 팀을 이뤄가고 있다. 아내의 말은 나를 다져주고 질책하고 안아준다. 그 말에 나의 말을 더해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는 마음들이 오늘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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