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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솥을 버린 아내

by Johnstory

결혼 후 지난 10년간 두 개의 밥솥을 버렸다.


동일한 브랜드에서만 두 종류의 밥솥을 차례로 구매했고, 내부 소모품을 몇 차례 개별 구입하여 아내는 직접 갈아 끼워가며 잘 사용해 왔다. 18평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십 년 만에 34평 인생 첫 자가에 입주하면서도 6인용 밥솥은 그 역할에 충실했다. 아내는 매번 밥을 여유 있게 하고 작은 용기에 소분하여 얼려두었다. 한 그릇보다 적은 양(나의 기준이다)으로. 매 끼니때마다 잘 찾아먹었고, 맛도 좋았다. 쌀의 종류에 따라 특유의 향도 났다. 입맛 없는 날에도 참치캔과 조미김 하나만 있으면 얼린 밥은 제 역할을 잘 해냈다.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아내의 손을 거쳐가는 동안 큰 기여를 한 그 밥솥을 내어놓았다.



그 배경엔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압력밥솥이다. 전기밥솥이 따라 할 수 없는 맛을 내는 압력밥솥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압력솥의 처음은 아니었다. 종종 쌍화탕으로 수육을 만들 때나 김치찜 용으로 쓰던 이 밥솥을 기본에 충실한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 헸다. 기분 탓일까. 압력밥솥에서 뜸을 들이고 기다린 밥맛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큰 차이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 차이가 미세한 것도 아니었다.

누룽지와 숭늉을 선호하는 9살 둘째 아들의 입장에선 너무나 행복한 일이었다. 한동안 밥 대신 누룽지가 주식이었던 둘째는 지금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는 것은 아닌데, 무튼 식사 때마다 누룽지를 찾고 숭늉을 마신다. 양가 할아버지들을 닮았다고 좋아했다.



한 가지가 궁금했다. 전기밥솥과 압력밥솥의 번거로움의 차이가 있을까.

아내는 없다고 했다. 잘 알지 못하는 나의 입장에선 왠지 압력밥솥이 손이 더 가고 신경 쓸 것이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라 했다. 그렇다면 한동안 난 압력솥으로 지는 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별것 아닌 밥솥의 이야기를 듣게 된 장모님은 KUPER 압력솥을 주셨다.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난 또 다른 압력솥밥의 세계에 놀랐다. 압력의 단계별 조절도 가능했다. 역시, 경험하지 않고선 어떤 대상이든 진정한 가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전기밥솥이 있던 자리는 커피머신이 채웠고 밥만큼이나 우리 부부에게 중요한 커피의 상징성이 부각되었다.



밥솥은 다음 날 새벽 재활용품으로 수거되었고, 지난 10년간의 결혼생활은 이제 새로운 10년을 향하는 시작 앞에 서있다.


전기밥솥이건 압력밥솥이건 밥이 되는 건 똑같고 아무리 맛있어 봤자 결국 '밥'이다. 약간의 시간과 정성을 내어 신경 쓰는 미세함은 이 과정을 돌아볼 줄 아는 이들이 머무르며 '느끼는' 것이기에 일반적이라 말할 수도 없다. 앞으론 더더욱, 잘된 밥도 누른밥도 그러다 타버린 밥도 더 다채롭게 경험할 인생이겠으나 또 다른 새로운 밥솥이 자리하기까지 지금의 아주 작은 차이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아끼며 보듬는 감사의 시간이 깊은 맛을 내어주는 압력솥 안에 가득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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