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관찰일지>를 연재하며 생긴 변화가 있다.
늘 아내는 그렇게 해왔던 것인데 말과 행동을 관찰하며 나의 해석을 더한 기록을 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나의 해석이 애초 아내의 의도와 맞아떨어지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건 부부의 대화를 통해 언제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니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내의 행동에 대한 의도를 생각하는 과정이었다.
'왜'에서 출발하여 하나둘 기록하며 아내를 이해하는 과정은, 애초 아내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상관이 없었다. 다양한 선택지에서 한 가지를 고를 때의 신중함 이면에 있었을 고민의 과정에 고마움을 갖게 되었고 '왜 그렇게 해?'라는 의문대신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여유도 생겼다. 물론 이런 이해의 스펙트럼이 확장되었다고 부부간의 마찰이 없을 수는 없다. 나의 해석이 다다른 곳이 내 세계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으로 향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큰 힘을 갖는다. 나를 한 템포 쉬게 하고 한 걸음 멀리서 아내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관찰일지>를 쓰며 종종 등장한 두 아이들은 여전히 겨울방학 중이다. 매일 짜인 일과에 따라 생활하나 여전히 그 과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11살, 9살의 시선으로 바라본 '겨울방학'을 생각해 보면 긴장이 풀어지는 느슨함이 생긴다. 새 학년을 준비하고 사전학습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간이다. 이 시기에 학원숙제와 문제집들을 푸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란 얘기다. 그러면 '이거 왜 안 했어?'라는 타박 대신 '방학이라 좀 더 쉬고 싶지?'라고 한 번은 물어볼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우리가 Good Cop Bad cop의 역할을 잘해야 한다며, 나는 아이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아이들의 생각을 듣다 보면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가 생긴다. 역시 행위주체인 아이들을 관찰하며 얻은 아량의 관점이다.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 다정함을 의미하기도 하겠으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해와 수용을 전제한 질문과 대화를 하는 것 또한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만 있으면 두 아이가 우리 부부가 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대화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조금씩 각자의 방향, 옳고 그름의 기준을 알아갈 것이다. 그리고 부모인 우리는 여전히 잘 관찰해야 할 것이고.
주고받는 것이 가치가 있음은 '관찰의 영역'에도 적용된다.
나는 아내가, 우리 아이들 또한 나를 잘 관찰해 주기를 바란다. 남편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빠가 왜 우리들에게 이런 걸 하라고 하는지에 대해 잘 생각해 보면 내가 평소에 어떤 생활을 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일상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들의 근거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나 스스로에게 적용시키면 자신의 행동 또한 관찰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의 감정이 어떤 곳을 향해 있는지, 이쯤에서 내가 수정해야 할 것은 없는지, 부정적인 생각들을 피해 밝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빠르게 준비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의 타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누군가를 관찰하다 보면 관심이 생긴다. 나의 관심은 타인에 대한 일정 수준의 애정과 이해를 수반하고 객체로서 '인정'하게 되며 나와 동등한 존재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이제부터 나의 절대적인 옳음이란 없음을 깨닫기 시작하고 타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나 역시 그런 대접을 받길 원한다. 흔히들 말하는,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임을 인정하며 우리는 삶의 여유를 갖게 되며 안정을 찾는다. 설령 타인이 나를 그런 식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 역시 타인의 선택이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기대감이 사라진 관계는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 또한 수월해진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관찰은 여유를 갖는 것이다. 조급하지 않게 사소한 것들을 펼쳐내는 과정이다. 남들에게 들킬 이유도 없다. 나 스스로 이 과정을 잘 해내면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계를 정의할 수 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에 목메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지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리하다 보니 관찰은 타인이라는 대상에서 시작했지만 나에게 이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바꾸려 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관찰은 더더욱 의미가 있다. 더불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관찰로 확장하다 보면, 중요하게 남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저 존재하는 타인과 환경으로 괴로워하지 말고 나의 객관적인 정의를 통해서 오롯이 나의 행동에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니 관찰의 효용은 이미 이것으로 충분하다.
아내를 관찰했을 뿐인데 내 삶을 좀 더 밀도 있게 살아낼 용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