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촉 말고 아내촉
이 비밀을 알고 있다.
아내는 기억력이 좋다. 아니, 좋다는 말보다 독보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10년 전의 세부적인 기억까지 아내의 세포는 기억하고 나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 어느 시점엔가 한 마디씩 던진다. '그때 왜 그랬었잖아'로 시작되는 얘기를 들을 때, 난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던 아내 피셜의 과거에 놀라고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노화에 또 놀란다. 아내는 나와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일기도 쓰지 않는 여자의 놀라운 촉은 마디마디 기억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제텔카스텐(Zettelkasten)* 에 근거하고 있다.
*제텔카스텐(Zettelkasten): 연구와 공부에 도움을 주는 지식관리, 메모작성 기법
아내(혹은 여자일 수도 있겠다)의 기억에는 이런 식의 분류가 잘 되어 있을 것인데, 유독 그것이 나의 유흥 그리고 과거와 관련된 쪽으로는 참과 거짓을 분간해 낼 수 있는 오답노트 또한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촉이란 것이 갑작스레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정확성 높은 예측의 근거가 되는데 가끔은 신에 들린 것처럼 시나리오를 써 내려간다. 그럼 보통 그렇게 일이 전개되었다. 나의 이직 성공 그리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던 청약의 당첨 등에 대해선 특히나 정확도가 높았다. 왜 그렇게 되는데,라는 나의 질문에 아내가 속 시원히 답해준 적은 없었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라는 한마디 말에서 전해지는 신뢰감은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종종 특정 주제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라는 질문을 아내에게 하곤 하는데 그때 아내가 하는 얘기를 듣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결론은 비과학적이나 그 과정에서 찾아내는 연관성 높은 기억의 카드들은 팩트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아내의 촉으로부터 무심히 던져지는 예상이 뜬구름 잡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내의 촉을 존중한다.
이는 아내 말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다, 로 연결되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함께 사는 10년 동안 난 아내에 대한 신뢰도가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치솟은 것이 사실이고 아내의 조언을 잘 따른다. 이건 어찌 보면 분업과도 같다. 일에 대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 나로서는 사소하게 놓칠 수 있는 것들을 아내가 챙겨준다. 우산을 준비하거나, 옷은 어떻게 입고 가라거나 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 말이다. 빠르게 병원진료를 받으라고 몇 해 전부터 말한 아내를 무시하고 뭉그적거리다 개복수술도 했었다. 아내의 촉과 나의 미련함은 상대적으로 그 차이를 더 크게 벌려놨고 난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내의 힘을 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이런 남편이 버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되려 반대의 경우로 사는 아내들 또한 많을 텐데, 어찌 보면 피곤한 삶이다. 그래서인지 아내의 촉이 좋은 표현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오늘 그렇게 입고 나갔다간 얼어 뒤질 텐데, B형 독감 걸려서 일주일 내내 끙끙 앓아눕고 싶은 거 아니면 패딩 입고 나가라!
이런 식이다. 이럴 땐 아내의 촉에 대한 신뢰도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저 말투의 강압성과 그로 인한 두려움으로 난 깊게 생각하기를 멈추고 시키는 대로 한다.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일 테니 말이다. 그러면 왜 혼자 알아서, 굳이 아내의 촉을 빌리지 않고서 스스로 알아서 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난 이것을 부부가 된 이유에서 찾았다. 각자 갖고 있는 부족함을 채워주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양극과 음극이 만나 달라붙는 자석처럼 하나가 되어 나에게 없는 것을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가끔 그러다 돌겠다 싶으면 같은 극의 성향으로 돌변해 격하게 밀어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시 돌아온다. 부모로서의 의무, 남편으로서의 의무,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출발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아내의 촉은 결혼 전부터 나와는 완벽하지 않아도 감사하며 애쓰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 이상을 기대했으나 체념 하며 사는 편이 더 낫겠다는 촉이 발동했을지도 모르고.
하루하루의 삶에서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분류하여 정리하는 아내만의 제텔카스텐이 늘 성실하게 일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앞으로 나와 우리 가족의 선택에 있어 정확도 높은 예측과 조언을 쏟아내는 순기능의 연속이길 바란다. 모든 일이 사람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 아내의 본능적인 촉은 늘 제 역할을 다하고 빛을 내었으면 좋겠다. 기억의 제텔카스텐을 야금야금 먹고 더 예리한 촉으로 성장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