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와 달팽이는 상추를 좋아한다.
조용한 아침, 달팽이가 식사를 하러 천천히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아삭거리며 상추를 먹는 소리를 들어본 이는 안다. 생각보다 달팽이는 빠르게 움직이고 말랑한 몸통에 비해 상추를 씹는 소리가 경쾌할 정도라는 놀라운 사실을.
습지생물 보습용 바닥재와 큰 돌멩이 위에 몸을 비비고 놀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때에 행복한지 충분히 알고 있는 생물임이 분명하다. 달팽이의 마당으로 50x30 정도의 채집통은 크진 않지만 나름의 생활을 누리는 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고요한 새벽, 거실 식탁에 앉아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나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이 시간과 공간은 내게 더없이 충분한 마당이다. 같은 곳인데 매번 다른 세상이 보인다. 어제의 글과 오늘의 표현은 닮은 듯 다르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순간도 그곳에선 구름 위를 난다. 많이 채워온 것 같은데, 언제나 백지상태다. 그래서 자를 대고 연하디 연한 연필로 바른 선을 긋는 것조차 두려울 때도 있다. 그 두려움에 한동안 발을 붙이지 못하기도 하고, 마음으론 그리워하면서 누군가의 흔적을 엿보는 것으로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꿈은 자란다. 상추와 오이를 아삭거렸던 백와 달팽이처럼 모눈 노트에 2B 연필로 사각 거려본다. 새벽 네시 반의 공기는 그 소리를 증폭시킨다.
누군가와의 대화보다 글이 더 편한 나는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도 있었다.
글로 생각을 드러내고 마음을 전하는 것은 늘 설레는 일이었다.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나의 업무역량에 이를 십분 활용하지 못한 안타까움은 마흔 중반이 넘은 지금에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그럼에도 괜찮다. 나의 생각과 마음에 들어온 여러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펼쳐 내보일 공간이 있으니 말이다. 죽도록 힘들고 괴로웠던 어느 날에도, 난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쓸 수 있었으니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고,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하루하루 완성해 갈 수 있었다. 타인과 조직 그리고 사회에 위로가 되며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했는데, 매번 내가 위로받았다. 들어온 것을 적절하게 분출하고 또 가다듬기도 하며 다른 내일을 준비했다.
정말이지 길을 나서고 싶지 않은 그런 날에도, 걸으며 달리며 오를 수 있게 해 준 것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인가 무수히 흘린 땀의 의미를 기록해 둔 탓일 테다. 휘발되어 잊혀간 기억이지만, 나의 글은 남는다. 뒤적거리며 찾아보는 그 여정에서 발견하는 일 년 전 나의 글들이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내게 온다.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으나, 나는 또 가지를 치며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기록한다. 그러다 더 이상 진도가 나아가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내 서랍에 소중히 넣어두면 그뿐이다. 그러다 봄꽃이 작열하는 태양에 피어오른 어느 날, 다시 그 서랍에 묵혀 둔 마음을 완성해 본다.
미완의 것이라도 소중히 다룰 수 있는 공간, 수년 전의 기억들을 되새김질하며 추억할 수 있는 마당, 그 안에서 여전히 철없는 소년의 마음이 될 수 있는 무한의 바다에서 나는 매일 자유롭다. 되도록 이 헤엄이 천천히 끝나기를, 구름 위에 걸린 태양이 오늘은 조금만 더 머물기를 바란다. 그림자가 되어 또 다른 나로 남을 이 흔적들은 이제 꿈이라 부른다. 삶의 찬미는 생존 그 자체에 있음과 다름없다. 살아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 힘으로 걷고 생각하고 기록하고 또 남길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제 갓 십 년을 더 산 나의 두 아이가 백와 달팽이를 호기심과 사랑 가득한 눈 빛으로 바라보듯 젊은 시절의 아빠가 남겨 둔 오늘의 내 꿈들에도 언젠가 따듯한 시선을 두어주었으면. 그리고 이 공간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음을, 나답게 살아볼 수 있었음을, 아주 가끔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 목적 없는 여행도 해봤음을 이해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