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발견

by Davca

그래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12월 어느 밤, 어지럽게 취한 그날

울먹이던 나의 목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받아주던 선배가 있었다.

온갖 짜증과 하소연과 한숨과 후회를

그저 들어주던 이가 있었다.

털어낸 후련함은

그가 품고 있던 인내 덕분이었음을 그땐 몰랐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름 모를 일면식 없는 이가 쓴 짤막한 글 한편에

나도 모를 새 편안함을 느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등 뒤에서 몰래 쓰는 새벽의 글 위로,

방 안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와 딸아이의 얼굴이 묻어나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다.

그 순간에도 미상의 작가는 나의 등을 어루만졌다.

얼마만큼의 휴지를 뜯어낸 후

정신을 차리고 돌아본 나는,

흔들리던 약간의 흔적만 남았을 뿐

아직 무너지진 않았다.

그이의 글이 있었고 내가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절망과 어둠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거실에 홀로 앉아 멍하니 시간만 죽인다.

그렇게라도 이 순간을 사는 게,

더 초라하게 녹아내리는 것보단 낫지 싶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럴 거면 나랑 이야기 좀 해보자 한다.

힘없이 걸어가 식탁에 앉았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옆에 있던 노트를 펼쳤다.

무언가를 한참 끄적였다.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정돈되지 않은 뜻 모를 글들을 마구 쏟아낸다.

멈춰지지 않았다.

얼마를 써 내려갔을까, 이윽고 정신이 든다.

혼자라고 느껴지던 그 순간에도

나 자신은, 내 마음과 정신은,

언제나 나를 채워주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편의점에서 묶음 할인하는

작은 캔맥주 몇 개를 집어 들었다.

길 건너 햄버거 가게로 가

이제 막 나온 감자튀김 두 개를 샀다.

쌀쌀맞던 12월 초겨울 밤,

가야 할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다시 편의점 밖,

외진 곳에 놓인 간이 테이블로 앉아 맥주를 땄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사실, 30년을 알고 지냈어도

그의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던 적은 없었다.

그날,

나의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모두 기억하는 이가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이가

그 친구뿐이었다.

청승맞은 짓을 마흔 중반이 넘어가도

멈추지 않는다며 타박해 오는 그리운 목소리.

교복과 사복의 변화를 함께 했고,

학교 축제도 누벼봤고, 망할 놈의 산이라며

가뿐 숨을 몰아쉬는 등산도

수차례 함께이던 그가 보였다.

시간의 흐름을

서로의 부모 머리 위에 하얗게 내려앉은

그 모습을 보고 가늠하던

그 시절의 친구는 이제

물리적으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곳에

결국 다다랐겠지만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내 앞에 앉는다.

그도 나도 고개를 숙이고 술만 홀짝였다.

먼 길을 와줘서, 고마웠다.

그래, 역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콧 등이 시큰해지는 그리움에 젖어있던

잠시의 시간을 뚫고

저기에서 누군가가 뛰어온다.

아직은 어설프고 연약한 그 모습에 놀라

벌떡 일어나 달려가 안아버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머리를 내리친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왜 더 뜨겁게 살아내야 하는지,

아무 말 없이 나의 가장 소중한 이들을 보내주며 그 뜻을 전했다.


지금 내 품 안엔 딸과 아내가 있다.

추위에 손이 시리도 몸이 떨려도

나는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느리더라도, 어설프더라도,

나여서 행복할 이들과 늘 함께였다.


세상을 떠난 이들과

남아있는 이들 모두

나의 곁에 있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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