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발견

by Davca

봉투를 받았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내 생일 때면 은행봉투 겉면에 짤막한 축하의 메시지를 적어 금일봉을 선물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내와 딸과 아들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선물하셨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낭만보단 현실을 중시 여긴 여자였다. 꽃보다 금을, 명품보다 현금을 선호하셨다. 무얼 사드려야 하나 고민해 봤자,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리 만무했기에 스스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현금을 선호하셨던 거다. 아버지도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내 동생도 머리가 좀 큰 이후론 편지를 쓰고 정성스럽게 선물을 고르는 대신 벌이에 비례한 금일봉을 드리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엄마로부터 마흔여섯 번째의 생일 금일봉을 받았다. 그리곤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최근 부모님 댁을 방문할 때면 이전에 나지 않던 냄새들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약재, 라기보다 정로환 같은 냄새와 나프탈렌의 향이 뒤섞인 것 같은 것이었는데 익숙지 않은 이들이었다면 조건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그런 류의 묵직한 향이었다.

또한 그것은 엄마의 방에서가 다르고, 아버지의 방에서가 다르다. (칠순이 넘은 두 분은 각방을 하신 지가 꽤나 오래되셨다. 그렇다고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고, 이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엄마의 취향과 선택을 아버지께서 존중하셨거나 마지못해 따르셨거나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 노인의 냄새였다.



최근 건강한 삶을 다루는 종편 방송에서 나이가 들수록 자주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노인의 체취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얘길 들었다. 나는 알지 못하는 호르몬의 변화와 여성과 남성의 어떤 차이에 의해, 그리고 시간의 흐름으로 켜켜이 쌓인 세월의 결과물로 풍기는 한 인간의 체취를 이제 갓 태어난 아이들의 뽀송뽀송한 살결의 냄새처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가끔 이런 걱정은 든다. 여전히 현역에 계신 아버지께서 출퇴근 시에, 그리고 회사에서 마주치는 이들이 아버지에게서 날 수 있는 노인의 냄새를 불편해하거나 거북해할지도 모른다는. 이건 싫은데, 그럼 난 과연 어떠했는가. 출퇴근 시 자주 이용하던 4호선과 1호선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어른들이 가꿔온 세월의 기억들에 순간적으로 불편해하지는 않았던가.



나는 왜 엄마가 준, 일흔 하나의 엄마가 전해 준 생일축하 금일봉에서 나는 그 냄새에 서글퍼졌던 것인가.

장남으로서 자식으로서 나는 그 노인의 냄새에 책임이 없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학창 시절 어지간히 속을 썩이고 살았기에 우리 부모의 체취에는 아들로 인해 썩어 문드러졌을 그 마음의 찌꺼기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IMF에 고3을 지나가며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외벌이 가장의 책임을 다해야 했을 아버지의 피눈물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서른아홉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그 시절 아빠의 서러움이 혼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십여 년간 잘 다니던 은행을 그만둔다고 하던 아들을 어떻게든 말렸으나 결국 내 판단으로 사직서를 내고 짐을 싸 온 아들의 뒷모습에 차마 말하지 못한 아쉬움과 원망의 마음도 녹아내렸을 것이다. 안정적인 연애를 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밤새 잠 못 이루며 묵주기도를 하시며 흘렸을 간절함의 눈물 또한 서려있을 것이다. 그것이 엄마와 아버지의 냄새일 것이다. 그것이 노인의 냄새가 될 것이다.



'젊은 이는 늙고, 늙은 이는 죽는다'는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다시 한번 무너졌다.

그렇다. 나 보다 우리 엄마 아버지는 좀 더 죽음에 가까워져 있다. 현실에서의 그 모습은 흰머리와 주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줄어드는 체중, 얇아지는 하체와 더불어 부모님 댁 곳곳에 퍼져있는 그 냄새로 드러나게 된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두렵다. 나의 부모는 여전히 노인이 아닌 것만 같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는 게 더 솔직한 마음이겠다. 이제 나의 첫째 딸아이는 고작 11살인데 내 부모의 시간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한 사람의 생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질 않는다. 너무 이질적인 두 세계이다. 사춘기가 오지 않은 딸은 여전히 아빠를 껴안고 잠들며 아빠의 품에 비비고 잠드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런 딸아이 냄새가, 그런 딸아이의 잠옷에서 나는 냄새가 좋다. 나의 엄마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러고 있다. 그런 내가 엄마가 준 봉투에서 살짝 풍긴 그 냄새에, 멈칫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내 부모가 노인이 되었음을 발견한 오늘,

나의 생일에,

내가 두 분께 드린 것은 불효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