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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비 Feb 01. 2024

이른 비와 늦은 비


 새로운 닉네임을 고민할 때다. 별생각 없이 지은 온라인 이름이 나를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나이에 비해 연령대가 높아 보였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어떤 새 이름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성경에서 본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 11:14)


 ‘이른 비’와 ‘늦은 비’ 둘 다 마음에 들었지만, 닉네임으로 간결하게 둘 중 하나를 고민했다. 이 구절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와 아열대성 기후가 교차하는 위치에 있다. 물이 부족한 지리적 위치와 시대적 배경을 떠올려봤을 때 비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축복으로 묘사되었는지 알 수 있다. 10월에 내리는 이른 비는 파종하는 시기에 내려 씨앗의 성장을 돕고, 4월에 내리는 늦은 비는 곡식을 잘 여물게 하여 결실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봄비다. 씨앗이 잘 자라도록 흙을 보드랍게 만들고, 풍성한 곡식으로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따뜻한 비. 그래, 따뜻한 비로 살아야지.


 이름과 다르게 늘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흔들리는 마음 기복과 인간관계에 춤을 추다 보면 마음 밭이 금세 가물어버리고 만다. 내 마음에도 내리지 않는 비를 무슨 수로 누군가와 나눌 수 있겠나. 


 마음이 푸석푸석할 때는 글도 그러한가 보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생기거나 불편한 감정이 들 때 글을 쓰곤 하는 데, 그런 글은 지나치게 이성적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과도, 나 자신과도 연결하려 하지 않고 상황만 열심히 분석해 보곤 한다. 마구 쓰는 글을 지켜보던 구성원은 나에게 말했다. 


“따뜻한 비가 아니고, 산성비야.”


뼈 때리는 통찰력을 발휘했다.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저 좋은 표현을 그동안 생각을 못 했네.’하는 생각뿐.  


 산성비가 아닌 따뜻한 비가 내 마음을 촉촉이 적시도록, 좋은 씨앗이 떨어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갈 수 있도록 마음 밭을 가꾸며 살아가고 싶다. 마음에 비가 내리도록 나만의 기우제 리스트를 만들어 본다. 


 첫째, 많은 생각이 찾아올 때는 몸을 움직이기


 둘째, 자책보다 따뜻한 혼잣말을 나에게 건네기


 셋째, 참지 말고 용기를 내서 감정을 표현하기


 넷째, 혼자 타인의 마음을 추측하며 걱정하지 않고 궁금한 건 물어보기.


 다섯째, 하고 싶은 일이 많아도 쪼개서 눈에 보이는 만큼 정리하며 하기. 


 어릴 때 기억 한 장면에 머리부터 신발 속까지 내리는 비를 흠뻑 맞고 집에 들어온 기억이 있다. 봄과 여름 사이었던 것 같다. 쫄딱 젖었는데 하나도 춥지 않았고, 아끼던 하얀 투피스가 비에 젖어도 슬프지 않았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졌다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튀어 오르는 빗소리가 귀에 들렸고, 그 리듬에 맞춰 왈츠를 추듯 걸었다. 비에 마음껏 젖을 수 있다는 자유를 처음 누리던 날. 그날 이후 나의 마음의 키도 훌쩍 자랐다.


 어릴 때는 내리는 비가 내 마음을 적셨다면 이제는 안다. 내 마음의 비는 원할 때 내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따뜻한 비를 스스로 내리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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