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아몬드’ –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불능증)
백혈병이 감기만큼 흔했던 때가 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어찌나 백혈병에 잘 걸리는지. 기억상실증도 마찬가지다. 교통사고만 당하면 죄다 기억을 잃는다. 언어능력 저하 같은 다른 인지적 손상은 없고 말끔하게 자기 과거만 잊어버린다.
최근 대세는 감정표현불능증이다. 비밀의 숲에서 황시목 검사(조승우 분), 앨리스에서 박진겸 형사(주원), 악의 꽃 도현수(이준기)까지. 엄밀한 병적 분류는 뒤로 하고, 감정 표현이나 정서 공감에 어려움을 겪는 설정이 대세다. 이미 만화 장르에서는 무감정하거나 극도로 건조한 캐릭터가 종종 인기를 얻었지만, 빠른 전개나 강한 캐릭터를 원하는 드라마에 유행처럼 등장하는 양상이 신기하다.
감정표현불능증이란 단어를 널린 알린 것은 2017년 출간된 손원평 작가의 소설 ‘아몬드’다. 소설의 주인공인 선윤재는 선천적으로 편도체 크기가 작고 뇌 기능에 이상이 있어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불능증)로 진단되었다. 신체적 반응 외에 정서적 표현을 하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윤재의 성장담을 그린 이 소설 덕에 ‘알렉시티미아’라는 용어가 여기저기 포스팅되기도 했다.
감정표현불능증을 일컫는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는 1970년대 등장한 용어로 그리스어 어원상 ‘감정 없는 말’을 의미한다. 감정표현불능증은 특정 질환명이라기보다 병적 상태나 특성에 가깝다. 정신과 분야의 대표적인 매뉴얼인 DSM-5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5차 개정판)에는 알렉시티미아가 병명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소설에서는 선천적인 질환으로 설정되었지만 현실에서 감정표현불능증은 자폐증, 우울증 등에 동반되거나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간질 등의 신경질환, 손상이나 트라우마와 연관되어 생길 수 있다. 염증성 장질환, 제2형 당뇨병 등 신경정신분야 외 질환에서 감정표현불능증 동반을 조사한 연구도 있다. 앞의 1차적 질환에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정서적 증상 중 하나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이 증상이 발생하는 병태생리적 기전도 아직까지 확립되지 않은 상태다.
새롭게 등장한 그 무엇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정표현불능증이 21세기에 등장한 신종 질병처럼 알려진 데는 아몬드의 공이 커 보인다. 성장소설로서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독특하게 정서장애가 있는 소년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잘 알려지지 않은 질환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유독 화제가 되었다.
한 친구는 알렉시티미아라는 이름이 있어 보여서(!) 특히 많이 포스팅되었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고 보니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신비롭게 들린다. 작중 영어 명칭을 쓴 것이 작가님의 탁월한 선택이다.
백혈병이 단골로 등장한 건 흔치 않은 병이고 치료가 어려워서 극적이며, 무엇보다 주인공에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백혈병이라는 이름부터 하얀 얼굴의 여성과 어울린다. 여리여리한 여주인공이 심근경색증이나 당뇨병이라면 매우 깰 것이다. 기억상실증도 장점이 명확하다. 깨어나서 멍한 얼굴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하면 바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 자아의 혼란 덕분에 적절히 백치미도 보여줄 수 있다. 감정표현불능증은 어떤 강점이 있나?
바야흐로 감정, 감성, 공감의 시대다. 감정 솔루션, 감성 마케팅, 공감 리더십 등 이런저런 글도 쏟아졌다. 지속되다 보니 이런 시류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다. 감정과잉의 시대, 감성충, 공감피로 같은 키워드도 등장했다.
공감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사람은 의심부터 든다. 부박한 근거나 내용을 은폐하려는 일종의 장치는 아닌지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데 감정은 필수적이지만, 사실을 기만하고 남을 착취하는 데에도 종종 사용되어 왔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지역주의자, 가족(!) 같은 회사, 능력은 검증되지 않고 이미지만 파는 정치인, 말도 안 되는 상품을 선전하는 사기꾼. 논리와 사실보다 정서와 공감을 이용하는 이들이다.
감정을 거세하고 공감 따위 개나 준다는 감정불능증 환자들이 이들에게 당하기는커녕 팩폭으로 맞서는 게 시원하게 느껴지는 건 감정과 공감을 파는 이들에게 피로함을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실제 감정불능증 환자가 증상 없는 사람보다 이성적이거나 판단력이 좋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신경정신질환을 동반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자폐증 환자가 다 천재는 아니듯이 픽션은 픽션일 뿐.
아몬드에서 주인공 윤재는 감정을 표현하지도 읽지도 못하지만 정작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편가르고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고 동물을 죽이는 건 감정이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다른 이의 몫이다. 정상과 비정상, 감정과 이성, 폭력과 고립에 대해 여러 층위로 생각하게 하는, 생각할수록 깊이 들어가게 되는 소설이다.
실제로 감정표현불능증의 특징을 보면 사이코패스와는 상당히 다르고, 오히려 상반되는 점이 많다. 감정의 결여가 흔히 비인간성이나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연결되던 양상에서 선역 주연급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했으니 가히 신분 전환이다.
그건 그렇고 감정불능 캐릭터가 대부분 남성이다. 남성은 이성적,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선입견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이 증상을 써먹는 작품에서는 성별에도 변화를 주길.
다음에는 어떤 병이 유행할까? 한 친구는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시류를 타고 오프라인 접촉을 두려워하는 관계공포증이 유행할 것이라고 점쳤다. 코로나의 특징적 증상이 미각∙후각 상실이니, 미각장애나 후각장애도 괜찮아 보인다. 마스크든 뭐든 이용해서 얼굴을 가려야 나갈 수 있는 가면애착증은 어떨까. 뭐가 됐든 물리적∙감정적 거리두기에 걸맞는 쿨한 병이 뜨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참고문헌
ScientDirect. Alexithymia - an overview. https://www.sciencedirect.com/topics/neuroscience/alexithymia Accessed Oct 3 2020
Martino G, et al. Front Psychol. 2020 Aug 28;11:2026.
Haviland MG, et al. J Pers Assess. 2004 Jun;82(3):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