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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Oct 23. 2020

범인은 바로 너!! 혈청요법

코난 도일 ‘기어다니는 사람의 비밀’

유래없이 빠른 개발, 허가 과정을 거쳐 코로나19 백신이 공급되고 있다. 다양한 기전의 치료제도 속속 개발되어 조만간 등판할 것으로 보인다. 혈장치료를 받은 중증 코로나19 환자가 완치되었다는 뉴스를 종종 본다. 미국 FDA에서 혈장치료를 코로나19 치료에 긴급 승인했지만 말 그대로 ‘긴급’이라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은 약제를 특별한 응급 상황에서 사용하는 용도다. 임상 데이터가 충분히 구축된 후 상용화될 것이다.

현대의학에서 공인된 치료법은 어디까지나 근거와 규제에 의거한다. 충분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비방’은 없다.


혈장치료 하면 뜬금없이 코난이 떠오른다. 명탐정 코난이 아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원작자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이 소설에서 혈청치료를 차용했다.

  

이 코난이 생각났다면 꽤나 중후한 연식이다.


1923년 발표된 단편소설 ‘기어다니는 사람의 비밀’은 셜록 홈즈와 조수인 왓슨이 저명한 생리학자 프레스버리 교수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결혼을 앞두고 체코로 여행을 다녀 온 프레스버리 교수는 오랫동안 키우던 개에게 공격을 받고, 밤에 원숭이처럼 기어다니고, 심지어 밤에 넝쿨을 타고 벽을 기어오르기까지 한다. 교수의 딸은 한밤중에 자기 방 창문밖에 매달린 교수를 목격하고 공포에 질린다.


외국 여행 중 흡혈귀에게 물리고 오기라도 한 걸까? 으스스한 이 사건에서 셜록 홈즈는 미스테리한 편지, 이상하리만치 두꺼운 교수의 손가락 관절, 9일 간격으로 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을 단서로 진상을 파악한다.


 


범인은 혈청이었다. 정확히는 원숭이 혈청. 딸뻘의 어린 여성과 결혼을 앞두고 젊음을 되찾고 싶었던 61세 교수는 프라하의 과학자로부터 랑구르 원숭이의 혈청으로 만든 ‘불로장생의 약’을 받아 9일마다 자가주사했던 것이다. 주책맞은 교수는 그 결과로 벽을 타고 오를 정도로 기력을 찾았지만 부작용으로 원숭이처럼 몸이 변하고 원숭이의 행동거지를 따라하게 되고 말았다.   

검증되지 않은 의약품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원숭이의 혈청을 투여했다고 해서 원숭이처럼 손가락이 변하고 원숭이의 냄새를 풍기고 원숭이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하물며 젊음과 기력을 되찾을 리는 만무하다.  


랑구르 원숭이. 소설에서는 사람과 비슷하기에 이 동물의 혈청을 사용했다고. 애꿎은 녀석.


혈청은 혈액의 일부를 말한다. 혈액의 성분 중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세포 부분을 제외한 액체 부분을 혈장, 혈장에서 혈액의 응고인자인 섬유소원(fibrinogen)을 제외한 것이 혈청이다. 혈액 샘플을 원심분리해서 응고된 부분과 세포를 제거하고 남은 액체 부분이 혈청이다.


혈장(혈청)에는 각종 알부민, 호르몬,  항체(면역글로불린)가 포함되어 있다. 항체는 세균, 바이러스 등 병원체에 대항에서 싸우는 역할을 하기에 진단과 치료에 사용된다.


혈청 검사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발견되면 과거에 감염되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 다만 감염되어도 항체가 생성되기까지는 1주, 또는 3주 이상 걸리므로 주사기로 혈청을 뽑아서 현재 감염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면봉으로 콧구멍을 콕 찔러 채취한 점액으로 바이러스를 검사하는 방법을 쓴다.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된 환자의 혈액에는 항체가 다량 포함되었기에 이를 채취해서 다른 감염자에게 투여해서 치료하는 것이 혈장치료다.  엄밀한 의미로 혈장과 혈청은 다르지만 둘 다 항체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혈장치료(convalescent plasma therapy)와 혈청치료(convalescent serum therapy)를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혈액에서 세포를 제외한 윗부분이 혈청이다. 항체가 있어 병원체에 대항해 싸우는 역할을 한다.


혈청요법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1890년에 동물에게 디프테리아, 파상풍을 일부러 감염시켜 항체가 생긴 혈청을 뽑아 사람에게 투여하기도 했다. 1923년 발표된 이 소설에서 혈청 치료를 도입한 것도, 현대적인 생리학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무리한 설정이 들어간 것도 이해되는 지점이다.


특정 병원체에 효과적인 항체가 있는 경우 투여하면 치료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겠지만 프레스버리 교수처럼 전~혀  뜬금없는 원숭이 혈청을 투여하면 효과는커녕 감염되거나 부작용만 생길 수 있다. 절대 젊음을 가져다 주지 않을 뿐더러 기원생물의 특성을 그대로 옮겨주는 마법의 유전물질도 없다.


어릴 때는 이 소설을 읽고 홀딱 깼다. 과학적으로도 엉터리인데다, 알고 보니 범인은 원숭이 혈청이었다는 식으로 낯선 기술을 도입하는 건  추리소설에서 공정한 게임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코난 도일은 해파리, 뱀 등 꽤나 뜬금없는 범죄도구를 종종 사용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코난 도일은 추리소설 작가지만 SF 소설도 썼다. 의사였고 새로운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은 나머지 새로운 생물종, 새로운 의약품 등을 도입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셜록 홈즈의 캐릭터도 코난 도일의 실험을 수행하는 데 딱 들어맞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실험가다.


코난 도일이 말년에 심령학에 심취한 것도 세계에 대한 끝없는 탐구정신의 일환이었을지 모른다. 당시  과학으로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셜록 홈즈는 미친 과학자여도 어울리는 캐릭터다. 셜록 시즌 4에서 프레스터지 교수가 잠깐 언급된다.


돌이켜 보면 셜록 홈즈를 좋아했던  홈즈의 매력도 한몫했지만,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트릭이나 도구를 과감하게 범죄에 사용하고 이를 밝히는 과정이 통쾌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에서는 기술을 단순히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변화를 상상해서 이용했으니, 비약이 무지막지해서 그렇지 나름 SF 요소가 있는 추리물이다.


대세 SF작가인 김초엽 님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SF는 항상 우리가 지구환경, 우주, 우리 몸이 기술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유전적 공학을 통해 어떤 괴물들이 만들어졌는지를 다뤄왔습니다. 그래서 SF는 '얽힘'을 다루기 좋은 장르에요. SF를 통해서 현재의 얽힘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프레스버리 교수가 과학기술의 괴물이 되는 과정을 좀 더 치밀하게 다루었다면 정말 SF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괴물이 되는 동기가 하필 어린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라니 대단히 찌질하긴 하지만. 하긴 성 선택만큼 강력한 과학적 동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참고문헌

Montelongo-Jauregui D, et al. PLoS Pathog. 2020 Aug 12;16(8):e1008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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