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우 ‘검은 개가 온다’ – 항우울제와 치즈 효과
꼬꼬마 시절 치즈는 ‘톰과 제리’ 같은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의 음식이었다. 가정환경이나 지역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에서, 특히 지방의 서민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접하는 식품은 아니었다. (음, 연식이 나온다)
1980년대 후반이었던가, 처음 만난 슬라이스 치즈는 꿈에서 그리던 그 모양, 그 맛이 아니었다. 멋대가리 없는 평면적 형태에 냄새는… 달콤함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아동의 입맛에 치즈는 쓰고 텁텁하고 꼬릿꼬릿했다.
치즈와의 첫 만남에 절망했던 촌스런 꼬마는 이제 꼬릿함을 즐기는 어른이 되었다. 발효식품과 친해지는 일,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었다는 수백 가지 증거 중 하나다. 영화에서 보던 우아하게 와인 한잔, 치즈 한 조각은 환상이 아닌 일상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치즈도 누군가에게는 위험할 수 있다.
산 속에서 20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된다. 이름은 설리사. 부패·훼손되어 정확한 사인을 판별할 수 없다. 독극물 검사 결과 항우울제인 페넬진, 신경안정제 알프라졸람, 수면제인 졸피뎀이 검출되었다. 설리사는 죽기 전 모임이 있었고 다량의 와인과 치즈를 섭취했다.
송시우의 추리소설 ‘검은 개가 온다’에서 벌어진 미스터리다. 설리사는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신경안정제, 수면제를 복용한 데다 알코올까지 섭취했으니 위험하다. 중추신경을 억제하는 물질들이 상승작용하여 호흡 마비로 사망할 수 있다.
특이한 사항은 페넬진(phenelzine)이다. 이 약은 모노아민산화효소 억제제(MAOI, monoamine oxidase inhibitor) 계열 항우울제로, 부작용이 많고 복용하기 까다로워서 국내에서는 더 이상 시판되지 않는 구세대 약이다. 안전성이 개선된 신세대 항우울제들이 즐비한데 굳이 투여할 이유가 없다. 외국에서도 다른 항우울제로 효과가 없는 경우에 처방하는 약제다. 페넬진이 검출되었다는 건 외국에서 들여온 약을 먹었다는 뜻이다. 굳이 왜?
실마리는 치즈다. 치즈 효과, 일명 “Cheese effect”를 노린 것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행복해지는 효과가 아니다.
1960년대 영국의 한 약사는 아내가 치즈를 먹고 나면 심각한 두통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내는 우울증으로 MAOI 계열의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이후 항우울제와 치즈 간의 상호작용이 알려졌다.
치즈, 특히 숙성된 치즈에는 다량의 티라민(tyramine)이 포함되어 있다. 티라민은 말린 생선, 발효식품, 소나 닭의 간에 함유된 아미노산으로 과량 섭취하면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상승시키고 두통을 유발할 수 있다. 건강한 인체는 티라민을 분해하는 효소가 있어 큰 문제가 없다. 이 효소가 모노아민산화효소(MAO)다. 항우울제인 MAOI는 이 MAO를 억제한다. 그래서 모노아민산화효소 억제제다.
MAOI 복용자는 티라민을 섭취할 때 “Hypertension crisis”의 위험이 있다. 티라민을 분해하지 못하기에 티라민이 과도하게 많아져 혈압이 갑작스럽게 상승하고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1962년 연구에서는 MAOI와 치즈를 복용한 사람들에서 상승된 혈압이 160/90mmHg 에서 220/115 mmHg까지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음식을 먹고 1-2시간 후에 측정한 결과다. 한국에서 정상혈압 기준은 120/80mmHg 미만이다. 고혈압 중에서도 단계가 높은 2기 고혈압 기준이160/90mmHg 이상임을 생각하면 무척 높은 수치다.
소설에 등장하는 페넬진의 MAO 억제 작용은 비가역적이고 비선택적이다. 가리지 않고 억제하며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약은 더 이상 국내에서 처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다른 MAOI인 모클로베미드, 셀레길린은 가역적, 선택적으로 효소를 억제하기에 부작용의 우려가 적다. 물론 주의는 필요하다. 모클레베미드의 의약품 허가사항에는 다음이 기재되어 있다.
이 약은 선택적 또는 가역적으로 작용하여 티라민과의 상호작용이 미약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식이습관을 가진 환자의 경우에는 특별히 제한식이를 할 필요가 없으나 모든 환자(특히 혈압이 높은 환자)는 티라민이 다량 함유된 음식물(치즈, 적포도주, 닭의 간, 청어피클, 된장 등)을 많이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된장’이 흥미롭다. 외국에서 개발된 약이지만 한국 허가사항에 ‘장’이 반영되었다. 나라마다 음식문화, 식습관이 다르므로 현지 실태를 반영한 결과다.
캐나다에서 MAOI 복용자의 식이를 위해 피자에 들어간 티라민 함량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피자를 많이 먹는 서구 국가이기 때문에 시행한 일이다. 한국도 식약처에서 배추김치, 된장, 양조간장, 재래간장, 고등어, 명태 등 식품을 대상으로 티라민으로 인한 유해영향을 평가한 적이 있다. 조사에서는 이들 식품 섭취 시 혈압 증가와 같은 유해영향이 우려되는 수준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물론 이는 국민영양조사 자료에 기반한 것이며 지속적으로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 대상 데이터는 아니기에 제품설명서에 기재하고 주의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Tyramine myth”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약물이 개선된 만큼 음식도 변화했다. 최근 연구를 보면 근 몇십년간 음식의 가공 방법이나 위생 환경이 급격히 달라졌기에, 티라민 함량에 대해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물론 고위험군은 늘 주의해야 한다. 통계나 데이터가 각자의 삶을 예측해 주지는 않는다.
소설에서 설리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을까. 수면제와 알코올, 거기에 항우울제와 치즈 효과라니. 죽음이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코를 촘촘히 짠 모양새다.
‘검은 개가 온다’는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추리소설인 한편, 우울증에 대한 깔끔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주관적으로 용감하게 써발긴 이런저런 우울증 글보다는 이 소설을 읽는 편이 정보 획득에도 유익하다. 우울증의 실태, 치료, 항우울제에 대한 철저한 자료조사에 더해서 항우울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임, 우울증을 이용하는 어떤 이에 대한 픽션이 찰떡같이 달라붙어 장르물로서도 흥미진진하다.
코로나19라는 역병 때문에 여행도 파티도 멀어졌다. 여행 중 만난 와인과 치즈는 오랜 추억, 먼 미래에만 존재한다. 어차피 고독한 밤이라면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도 좋겠다. 잘 숙성된 치즈처럼 풍부한 향미를 지닌 소설과 함께 하면서 검은 개의 잠입을 물리쳐 볼까.
*우울증을 일컫는 ‘검은 개(black dog)’는 우울증 환자였던 윈스턴 처칠의 표현에서 유래했다.
“나는 평생 검은 개 한 마리와 살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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